찌끄레기

by dy


버려지는 것들은 어디로 갈까. 하나의 완전체에서 쓰임을 다하고 버려진 작은 조각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분명 하나의 완전체일 때 그것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 이유를 가진 전체였다. 하지만 쓰고 남겨져 버려지면, 더 이상 의미도, 지향점도 남아 있지 않은 찌끄레기가 되어 버린다. 이런 작은 조각들은 더 이상 의미 없이 버려지는데, 만약 그것들을 모아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하나의 완전체가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다시 만들어진 완전체가 과연 이전의 완전체와 같을 수 있을까? 새로운 존재 이유와 달라진 정체성을 가진 그것을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쉽게 버려지는 것들에 애정을 두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버려지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버려지는 것은 단순히 버려지는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 모금 빨아들인 연기가 몸으로 들어온다. 타들어가는 담뱃잎은 자신이 가진 의도를 다하며 사라진다. 이내 손끝까지 다다르려는 열기를 피하려고 남은 부분을 모두 태우지 못한 채 행동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하나의 완전체가 그 형태를 잃는다. 그리고 끝의 나머지 부분은 버려진다. 자신이 가진 의미를 완수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더 이상 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찌끄레기가 되어 버린다.


커피를 마신다. 씁쓸한 검은색 액체가 입으로 들어온다. 입을 타고 위로 넘어와 몸에 알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킨다. 몸은 무언가 좋은지, 혈관 속 피가 빠르게 움직인다. 일정한 간격으로 마시고 삼키는 행동이 반복된다. 컵에는 아직 반쯤 남아 있다. 아직까지는 존재 이유를 완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내 조금씩 줄어들며, 결국 컵 바닥에는 보일락 말락 한 양만 남는다. 남은 것들은 이제 버려지기 쉽다. 그 의미를 다하기에는 이제 희미해져 버린다.


감정에도 이렇게 버려지는 것들이 있다. 감정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순화하려 한다. 약간의 아쉬움이 섞인 기쁨, 후회가 뒤따르는 슬픔—복합적인 감정 속에서 단 하나를 골라내야만 한다. 그것이 "주된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선택받는다. 그런데 선택되지 못한 감정들은 어떻게 될까? 그것들은 어딘가로 흩어져 사라지거나, 혹은 마음 깊은 곳에 찌끄레기처럼 남는다. 이 찌끄레기들은 때로 우리도 모르게 누적된다. 그러다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순간에 우리의 의식으로 밀려 나와 정리되지 않은 혼란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쌓인 찌끄레기들은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모호함,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감 같은 것들로.


하지만 이런 감정의 잔재에 애정을 두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 스스로도 그것에 무관심하다. 그래서 버려지는 감정들은 정말로 버려진다. 존재의 이유가 희미해진 그것들은 단순히 흩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사라진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감정의 찌끄레기들로 만들어진 또 다른 나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커피를 마셨다. 컵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털어 넣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액체였지만, 그것조차 이내 내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손끝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손끝의 뜨거운 열기를 무시한 채 끝까지 연기를 들이마셨다. 연기는 폐 속으로 퍼지다가 사라졌고, 뜨거운 열기는 손을 데게 만들었다. 남은 부분이 없다.


손이 데었다. 하지만 괜찮다. 따끔한 고통 속에서 후회의 감정이 스며들었지만, 동시에 이상한 기쁨도 느껴졌다. 약간 씁쓸한, 그러나 분명한 기쁨이다.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찌끄레기들이 사실은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의미를 잃은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버려진다는 것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우리가 외면하는 것들, 잊었다고 생각했던 조각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 결국, 버려지는 것은 단순히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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