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번호

by dy


하루의 생활 습관이 깨진 지도 어느덧 몇 달이 흐르고, 어김없이 늦은 저녁에서야 눈이 떠졌다. 눈을 뜨며 든 생각은 역시 오늘도 글러먹었구나. 하루가 이미 끝나 버린 것을 알기에 다시 눈을 감아서 하루를 끝내기에는 내 상태가 이상할 정도로 정상이다.


늦은 저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듯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그런 찬란한 빛이 아닌, 주변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켜져 있는 가로등 불만이 창문 커튼의 미세한 틈으로 들어온다. 여름의 습기와 잠을 자면서 흘린 땀으로 습하다 못해 축축하게 느껴지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고 몸에 힘을 주지만,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몸과는 다르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심장으로부터 시작되는 혈액의 흐름을 다리로 보내고, 그리고 양옆의 팔로 보내어 가까스로 일으킨 몸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내 방에 햇빛과는 다른 인위적인 빛을 더한다. 잠이 들기 전, 그러니까 오늘의 오전에 머리로 그리던 '모든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행동하고자 했던 그 다짐은 현재에 이르러 축축하고 늘어진 내 몸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확인한다. 특별한 연락은 없을 것이다. 항상 반복되는 그런 늦은 저녁의 그런 느낌일 뿐일 것이다. 알고 있기에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열어본다. 당황스럽게도 누군가에게 전화가 한 통 와 있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 하지만 나는 그게 누구인지 안다. 누구인지는 알지만 차마 저장해 두지 못한 그 전화번호를 나는 안다. 전화가 온 건 적어도 세네 시간 전으로, 늦은 저녁인 지금 다시 전화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렇기에 내일의 할 일로 미루듯 핸드폰에서 착신 이력을 지운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안부 전화를 드렸던 것 같은데, 오늘은 그 행동의 패턴에 어긋나는 그런 전화가 와 있다. 무슨 일일까?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지만, 차마 전화를 하지 못한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기에 눈을 붙이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혼자만의 생각을 하며 내일 어떻게 전화를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왜 전화하셨는지?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를 하신 건지?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어떻게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해야 하기에 대본처럼 어떤 내용을 말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생각한다. 목소리는 어떻게 내야 할까? 언제쯤 전화를 해야 할까? 와 같이 현재의 내 상황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대본과 상황을 연습해야 한다.


저번 주, 저저번 주를 포함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연락은 항상 준비된 대본과 상황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머릿속에 이 말을 하고 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연기를 했다. 내일 전화를 하게 된다면, 이번 주 돌아오는 그 습관적인 전화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무거워진다.


일어난 지 조금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점심, 저녁의 공복으로 비워진 배 속에 울림이 느껴진다. 뭔가를 배 속에 밀어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어떤 것들보다 먼저 든다.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대본과 상황이 어느샌가 뱃속의 허기짐으로 바뀌어 버린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 냉장고를 열어 보지만, 먹을 수 있는 게 없다. 아니, 먹을 수 있었던 것들이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렸고, 그것들로 넘쳐난다. 여기서는 배 속의 허기짐을 채울 수 없다. 싱크대 위의 선반을 열어 확인한다. 먹을 수 있는 건 라면뿐이다. 지금 내게 딱 맞는 그런 라면뿐이다.


습관과 같이 물을 올리고 라면을 익힌다. 라면을 한 젓가락 먹지만, 여기에서 맛이라고 할 건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맛을 느끼기 위한 행동이 아니다. 뱃속의 허기짐을 채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입에 들어오는 라면을 씹는다. 한 번이 아닌 열 번, 그리고 아주 잘게 잘게 씹어 삼킨다.


배 속에 들어가서 빠르게 흡수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잘게 잘게. 라면의 원 모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잘게 잘게 씹어 한 번, 두 번 삼킨다. 어느 정도 씹었을까.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배 속의 울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라면은 반이 남아 있지만, 울림이 사라졌기에 그리고 맛을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이내 젓가락질을 멈춘다. 더 이상 씹어 삼킬 필요가 없기에 이 행동은 여기서 끝이다.


배 속의 울림이 사라지니 다시 아까의 상황과 대본이 머릿속에서 얽히고설키면서 다시 떠오른다. 이미 몇 번이나 똑같은 전화를 했기에 걱정 없을 텐데, 습관과 다른 오늘의 전화에 마음이 한구석에서 조금의 감정이 일어난다.


목소리를 듣고 알고 싶지 않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생각을 알고 싶다. 그렇게 갑자기 그런 감정이 든다. 한 번 생각이 들자, 모든 대본과 상황이 다르게 머릿속에 장면 장면 흘러들어온다. 전화의 반대편에서의 목소리가 아닌 얼굴을 보고, 한마디 한마디, 잘 지내고 있다고, 아무 일 없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무슨 일 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


갑자기 든 이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몸을 움직이고 싶다.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3시 남짓.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확인해 본다.


기차와 버스를 타고 가야 할지, 차를 타고 가야 할지. 어디서 어떻게 가야 할지를 하나씩 생각하다 보니 감정이 조금씩 더 부풀어 오른다. 새벽이기에 첫차를 타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기차의 첫차는 6시. 아직 3시간 남짓 남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씩 짐을 챙긴다. 돌아가서 필요한 옷과, 그 외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개를 챙긴다. 감정이 조금 더 부풀어 오른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다시 이 감정이 줄어들고 앞으로 갈 수 없기에. 옷을 입고 방안을 한 번 둘러본다.


어질러져 있는 방과, 한쪽에 놓여 있는 짐들. 남아 있는 것과 가지고 갈 것들이 대비를 이룬다. 짐을 들고 현관문을 나선다.


밖은 새벽과 아침의 그 중간쯤에 해당한다. 발을 움직여서 기차를 타러 향한다. 지금 까지라면 나오지 않았을 이 시간의 나는, 아침을 사는 분주한 사람들 속에 섞여 든다. 나는 그들과 다르지만, 아침의 분주함이 느껴지기에 나도 어느샌가 그에 동화되어 간다. 빠르게 다리를 움직여 버스에 올라타고 그 사람들 사이에 서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나는 그곳에 섞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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