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좋아하는 데 굳이 이유가 필요한 걸까. 내가 좋다고 말하면,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데 세상은 이상하게도 감정을 설명하라고 요구한다. 마치 좋아한다는 마음이 단순하면 안 된다는 듯, 그 감정 뒤에 감춰진 구조와 동기를 캐내야만 안심하는 사람들처럼.
어떤 이들은 '취향'조차 증명해야 납득하는 듯하다. 끌리면 끌리고, 좋으면 좋은 것뿐이데. 그런데 그들은 그 단순함을 불안해한다. 꼭 무언가 더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내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확신과 호기심만이 진리처럼 앞세워질 뿐이다.
나는 그저 사진이 좋다. 찍는 것도, 그 사진을 벽에 걸고 바라보는 것도. 설명하려 애쓴 적도 없고, 이유를 손에 넣으려 한 적도 없다. 감정이 먼저 움직였고, 나는 그 감정에 따라갔을 뿐이다.
"벽에 사진이 많이 걸려 있는데 왜 그런 거야?"
"그냥 좋아서."
"왜?"
"그냥 좋아서."
"아니,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잖아. 예를 들어...."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질문자들은 그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 어딘가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런 질문이 반복될수록 마음속에는 작은 짜증이 쌓여갔다. 그리고 그 짜증을 드러내면, 모든 잘못이 곧바로 나에게 돌아오는 것처럼 굴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 질문을 파고들었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왜 화냈어?"만 궁금해했다. 그 순간, 내 감정은 무의미해졌고 그들의 궁금증만이 정당한 것으로 남았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좋아함'을 묻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받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감정에 있지 않았고, 내가 왜 그 감정에 머물러 있는지 밝히는 데 있었다. 그 호기심은 내게 칼날처럼 느껴졌지만 그들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나의 감정이 침해되는 것을 감내해야 할 이유는 없다. 질문이 잔잔해지 마음에 돌을 던지고, 이미 지나간 감정을 억지로 다시 끌어올리고, 그 혼란의 책임을 내 반응에만 돌려놓는 것 또한 더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이유를 짜내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의 기준을 위해 내 감정에 설명서를 붙이지 않을 것이다. 좋아함은 충분히 정당하고, 그 자체로 완성된 감정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저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문장을 변명처럼 내놓지 도, 누군가는 이해를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내 감정이 타인의 잣대에 흔들릴 이유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