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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선혈', 오만한 사막인들의 투쟁

하지은 작가의 '모래선혈'을 읽고

by 사일러의 항해

"모래 밑으로 허무하게 묻히는 오만한 자들의 투쟁"


지은이 : 하지은

출간일 : 2023.6.19

출판사 : 황금가지

장르 : 판타지 소설


*잡설 (스킵 추천!)

2주일만에 노트북 앞에 시간을 내어 앉게 되었다. 본래 1주일 정도 간격으로 글을 쓰고자 했지만, 역시 매일 1-2시간 씩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는 것은 쉬워도, 글을 쓰는 것은 어렵다. (다 쓰고 나면 훨씬 더 깊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음에도 말이다.)

지난 '미드소마' 리뷰로 첫 글을 쓴 후 빠르게 좋아요가 10개나 달리는 알람에 하루종일 기분이 뿌듯했다. 사실 그 뒤로 영화를 더 많이 봐서 영화 리뷰를 또 쓸까 했으나, 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로 얘기를 해두었으니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 하지은 작가를 처음 접했는데, 찾아보니 하지은 작가는 2세대 한국 환상 문학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한다. 첫 작품 『얼음나무 숲』으로 데뷔와 동시에 국내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문학성과 장르성을 아울렀다는 평가를 들으며 『드래곤 라자』와 『눈물을 마시는 새』 이영도 작가와 『룬의 아이들』 전민희 작가를 이어 명실상부한 한국 장르 문학 대표 도서로 자리매김했다고 하니, 이영도 작가의 광팬이자, 룬의 아이들 시리즈도 2번씩 읽었던 나이기에 대표작인 '얼음나무 숲'도 빠르게 읽어봐야겠다.

잡설은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이름부터 뜨거운 바람이이 느껴지는 '모래선혈' 이다.



*1. 호반위의 황금새 : 이상향를 쫓는 세 사막인 (*스포주의*)

*회색의 세상 : 극의 주인공이자 쿠세 제국의 황제의 동생인 '레아킨'에게만 해당되는 세상은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에게는 세상이 온통 회색빛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들에게는 합리적이지 못한 이 세상이 그저 무미건조한 음영의 차이 정도로만 느껴지는 듯 하다.


더군다나, 이 세상의 배경은 끝 없는 사막 위에 세워져 있다. 얼마나 덥고 단조롭겠는가. (선입견이다.)


레아킨의 품에는 '호반 위의 황금새'라는 책이 소중히 들어있다. 호숫가 위의 황금새라니. 이 글의 내용이 제목을 관념적으로 투영하고 있다면, 모든 것이 회색빛이었던 레아킨에게는 분명 이데아의 가까운 눈부신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빛을 보여준 글의 작가 '비오티'를 찾으러 제국을 탈출하여, 속국인 '라노프'로 향한다. 그는 라노프의 수도에는 혁명소이자 종교재판소이며, 쿠세 정부의 거점이자 감옥인, 이름마저 거창한 '죽은 탑'에 심판관 자격으로 어떻게든 황제 몰래(?) 발령된다.

황금새.jpeg 황금새 (출처 : 네이버 - 변종관님의 블로그)

참고로, 황금새는 실제 있는 참새목의 검정 몸통의 노랑 줄무늬(색감 좀 아는 녀석이다.)를 가진 새로 일본 등 섬에 서식하는 듯 하니, 칙칙한 사막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새일 것이다. 추측컨데, 책의 저자인 비오티도 황금새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만, 어느 날 비오티가 서점에서 읽던 책에서만 접했던 새를 최선을 다해 상상하고 그려내고 글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레아킨을 비롯한 사막의 존재들에게는 그야말로 찬란한 글이 된 것이 아닐까?


필자는, 이 글에서 레아킨만큼 중요하게 쫓아야 할 인물은 비오티가 아닌 '귀스트'라고 생각한다. 레아킨에게 심판관의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T자형 인재인(유능하다는 얘기이다.) 귀스트는 레아킨이 오기 전까지 심판관 업무를 보던 라노프인이다. 즉, 점령 당해 속국 생활을 하는 라노프인들에게는 가장 얄밉고 증오스러운 반역자라고 할 수 있다. 사막 판 '이완용'이랄까? 레아킨의 성격은 말라버린 깊은 우물이라면, 귀스트의 성격은 음험하고 축축한 늪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오티보다 먼저 소개되는 인물이 한명 더 있다. 라노프의 독립을 꾀하는 혁명군 대장 '라흐'이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한국인으로써, 왜인지 철딱서니 없는 레아킨보다 라흐를 더 응원하게 된다. 라흐와 귀스트는 본래 친구였으나, 태생적으로 다른 노선을 탔기에 지금은 피보다 진한 원수사이가 되었다. 오랫동안 귀스트는 라흐의 친구들을 잡아 고문하고 처형하는 업무를 해왔었고, 라흐 역시 그렇다.


아무튼 이 세 사막인들은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침침하고 어둡고 재미도 없고 회색빛이다. 그래서일까. 황금빛의 글을 쓰는 황금새 '비오티'를 두고 이 세 사람이 각각 엮여 사건이 펼쳐진다. 호숫가로 향하는 그들의 꼬인 사연들이 풀려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갑자기 분위기가 로맨스 같지만, 사실 어느정도 그러하다.


**초반부의 든 생각 : 라흐, 철 없는 서자(레아킨) 녀석은 빨리 죽여버려. 아아! 그는 주인공이 아니라서 이길 수 없겠지.




*2. 쿠세와 라노프 : 속국과 해방운동 그리고 비밀의 방 (*진짜 마지막 스포 주의문*)

라노프는 일제강점기의 한국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라흐의 연인인 카이라는 스스로 창부가 되어 쿠세의 주요 인물들에게 접근하여 정보를 빼오는 스파이 임무를 맡고 있다. 작가와 창부 편에서 카이라는 라흐의 옛 연인이자, 레아킨과 썸을 타고 있는 비오티를 독립을 위한 저항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으면서 독립을 바란다는 가식을 떨지 말라는 식으로 비판하게 된다.


사실 이 소설은 사랑과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인데,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진정한 사랑이나 자유를 얻지 못한채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특징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귀스트만이 떳떳한 자유를 찾고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것에 작은 여운이 남기도 한다.


죽은탑의 심판관이 된 레아킨은 실무 따위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 비오티의 꽁무니만 쫓아다니지만, 그러는 것 치고는 독립군들을 참 많이도 죽인다. 그가 뛰어난 칼 솜씨를 가질 수 있었던 원인은 아마 그가 별다른 감정을 잘 못느끼는 소시오패스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후의 이야기는, 독립군 분쇄기, 레아킨 X 귀스트 콤비에 우당탕탕 독립군 습격 대작전의 소소한 반전과 무뚝뚝한 두 남자의 대화에서 오는 조소로 구성되며 흥미롭게 진행된다.


결국, 죽은탑으로 끌려간 라흐를 가둬놓은 레아킨은 바로 귀스트에게 배신을 당하며(순진한 레아킨...) 탑 지하실에 갇히게 되고, 이윽고 비오티와 함께 천장에 달려있는 거대한 고치를 보게된다.



*3. 피로 물든 모래인들의 서사시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

작중 귀스트가 계속해서 숨겨왔던 비밀의 방에는 커다란 무언가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고치처럼 생긴 것에는 수수께끼가 적혀 있었다.


"그의 탄생에 세계가 운다. 그가 존재함에 세계가 탄식한다. 그의 손에 닿은 비(非)생명은 견디지 못하고 가장 작은 단위로 부서지며, 그와 마주 본 생명은 스스로의 치부를 견디지 못하고 영혼까지 썩어 분해된다. 그는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일 것이나 너무도 깊고 농밀하여 감히 품을 수 없다. 그는 누구이겠는가?" - <모래선혈>, 하지은


이 수수께끼의 답은 '타락'이었고, 비오티가 그 답을 말하자 타락이라는 관념이 고치 속에서 요란을 떨며 물질 세계로 튀어나오게 되버렸다. 비오티는 그 답을 어릴 적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아기모스의 책에서 보았던 것인데, 그녀의 집안이 아기모스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 집안이라는 떡밥은 되게 중요해보이나 사실 비중이 적어서 넘어가도록 하자. (적어도 나는 중요하거나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뒤의 진행되는 서사는 급진적이며 동시에 허무하기까지 하다. 독립군의 2인자에게 배신 당해 죽음을 맞이하는 라흐, 그 배신자를 죽이기 위해 돌아가는 카이라의 결말은 그래도 그들이 본인들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고 극 밖으로 나갔음이 느껴진다.


다만, 귀스트가 '타락'을 키우게 된 원한이 섞인 과거 이야기와 황제의 허접한 군대들, 레아킨 일행의 짧은 여행 후 너무나 쉽게 도달해버린 결말의 장까지 한 챕터만에 도착해버리자 독자로서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 결론적으로, 이 책은 3부작이었어야 한다.

1부는 라노프의 혁명군과 죽은 탑 사이의 이야기

2부는 정부군에 쫓기는 도망자들의 이야기

3부는 황제와 레아킨, 분노와 오만이 충돌하는 이야기


하지만 실 내용은 1부가 절반, 2,3부가 절반을 차지하여 앞서 뿌려놓았던 떡밥들의 다급한 회수로 진행되는 후반부가 아쉽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앞 내용에 대한 흥미로운 리뷰 대비 뒷 내용에 대한 감상이 짧을 수 밖에 없는데, 개인적으로 들었던 의문 몇가지를 제시하고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1. 사막의 강대국인 황제가 이렇게 쉽게 암살 당해도 되는 것인가?

- 황제의 근간에는 '오만'이라는 또 다른 관념이 형상화한 존재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 하더라도 그는 대사막제국의 유일무이한 황제인데, 그의 권능과 소문만 무성했던 여러 군대들의 존재감이 전혀 드러나지 못했다. 막말로, '타락'을 빼놓고 보니, 그는 그저 어리광을 부리는 한 애정결핍증 환자처럼 보인다.


2. 로맨스인 듯, 아닌 듯... 웅장한 듯, 아닌 듯... 독립운동인 듯, 아닌 듯...

- 하지은 착가의 대표작을 읽기 전 처음으로 접한 작품이다 보니, 이 전개 스타일이 작가의 고유 스타일인지, 이 작품에 한하여 아리송한 것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결론적으로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의 동력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개인적으로는 특히 여자 주인공인 비오티의 극 중 영향력이 아쉬웠는데, 적극적으로 운명을 결정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카이라 대비, 여러 남자 주인공들에게 휘둘리며 어설픈 관찰자로서 기능하는 비오티의 역할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녀에게 태생적인 비밀스러움과 레아킨의 열렬한 사랑 외에 어떤 주체성이 있었는지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3. 관념의 형상화와 폭발하지 못한 마무리

- '타락'과 '오만'의 결투로 진행되는 마무리가 결국은 불발로 마무리가 되었다. 무엇보다, 아기모스의 책과 얽힌 여러 떡밥들이 그대로 사막 밑에 파묻힌 것 같아, 왜 그렇게 급하게 극을 마무리했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강렬하게 들었다.

- 특히 황제와 레아킨의 과거를 보면, 그들이 왜 그런 성격으로 자라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지만, 그 설명의 100%가 황제와 레아킨의 현재 모습을 반영하기에 아쉬웠다. 성장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는데, 하물며 주인공들이라고 과거에서 영원히 못 벗어날 필요가 있었겠는가? 사랑을 위해 자유를 좇는 레아킨은 차치하더라도, 황제는 어떤 인간적인 성장을 이루었는가?


극 중 진정한 자유를 찾아 떠나는 이는, 결국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치열한 서사에도 꿋꿋이 본인의 복수를 이루어낸 귀스트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너네는 연애나 해라. 사랑에 대한 결핍을 마구 해소해라. 나는 나의 복수를 완성할테다.)


다만, 귀스트가 황궁을 떠나는 장면 조차 약간의 허무가 남았는데, 복수를 위해 자행한 귀스트의 여러 악행에 대한 대가는 어디로 갔는가?이다. 그는 이전 탑의 심판관으로서 여러 고문과 살인에 앞장서던 일급 매국노와 같은 역할인데, 그의 육체적인 결말 뿐만 아니라 영적인 결말까지 너무 상쾌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첫 글을 게시하고, 여러 작품들을 접하며 리뷰를 쓰려고 노력했으나,,, 거의 1달만에 두 번째 후기로 돌아왔다. (변명이지만, 이번 글을 거의 1달 동안 4번 씩 틈틈이 썼다.)


확실히 분량을 줄이면 조금은 더 쉽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잘 모르는 작가나 카테고리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자료 조사에 대한 추가적인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에 여전히 흥미롭고 어려운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마케팅이나, 여러 창의적인 분야에 대한 글도 쓰고 싶으나 이런 컬쳐 리뷰도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을 보아하니 습관화가 절실하다.


다음 번은 흥미롭게 본 영화와 그 영화를 찍은 감독의 이야기로 돌아오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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