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껍데기에 대한 통찰을 가능케하는 소설
지난주를 마지막으로 2년 8개월 넘게 다녔던 광고대행사를 그만두었다.
독서와 독후감을 취미로 가지고자 했던 목표도, 쏟아지는 업무에 치여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퇴사 후, 정확히 일주일 동안은 건강 회복을 위한 하루 운동 1시간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기만 했다.
문득, 퇴사 한 달 전, 가장 친하게 지냈던 직장 동료에게 선물 받은 양귀자 작가의
'모순'이라는 책이 눈에 밟혔다.
선물 받은 후, 출퇴근길에 3분의 1가량 읽다가 잠시 책장에 꽂아두었던 책이었다.
오랜만에 외출을 하고, 머리를 자르고, 근처 카페에 가서 진득하니 독서를 했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 잠시 책을 펼쳐두고 생각에 빠져있던 시간이 더 길었다.
'안진진'의 시선에서 나를 되돌아보게끔 하는 귀중한 글이었다.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결혼 전까지는 데칼코마니 같던 삶을 살던 안진진의 어머니와 이모.
각각 맞이하게 된 남편과의 결혼 생활로 그 둘의 인생은 꽃밭과 진흙탕으로 나뉘게 된다.
무던한 안진진은 폭력적인 술주정뱅이었던 아버지와 온갖 불행을 과장되게 견디며 사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부모님을 닮은 자기 자신과 남동생 진모의 삶을 단순하고 정확하게 짚어낸다.
안진진의 연극 속에서 스쳐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더 있다.
수십 년간, 인생이라는 열차를 운전함에 있어 단 한 번의 연착도 허용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이모부. 어머니의 아름다운 모습만 빼간 듯한 사랑스러운 이모. 이모와 어머니의 달라진 삶의 궤적을 증명해주는 또 다른 증거물인 이모의 두 자녀.
안진진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사랑해주는 두 남성. 김장우와 나영규. 그리고 그 둘 속에서 사랑이라는 진흙 속에 피는 꽃을 바라만보는 자기 자신이 있다.
나(필자)는 안진진처럼 어머니의 반, 아버지의 반을 닮았다. 그러면 나는 어디 있는가.
첫 사회생활을 지내며 끊임없이 되물었던 질문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다가왔다.
나는 씩씩하고 건조한 안진진과는 다르게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을 견디기 위해 미백하여 바라보는데,
양귀자의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내 온몸에 붙은 진흙들이 느껴진다.
삶의 진실이다.
소소한 불행과 커다란 불행의 차이점을 짚어주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불행의 과장법'이라는 대목이다.
나는 그 대목을 읽으며 소소한 불행과 다투는 것과 커다란 불행을 견디는 것의 용이성 보다도,
불행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지난 2년 8개월 동안, 나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환상 속에 나를 가두어 살고 사랑했다.
환상속에 사는 것은 불행과 다투는 것을 포기한 대가라고 느껴졌다.
돌이켜 보니, 까치산역 도보에서, 나에게 치근거리는,
내 얼굴을 까먹고 또 치근거리는 사이비 신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난 삶이 거짓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태도의 관점에서 능동적으로 살지 못했던 아쉬움이 몰려왔다.
회사 업무를 빼면 나의 껍데기에서 남는 것이 없다고 느껴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고,
안진진이 나영규를 바라보는 시선과 안진진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모순'을 읽고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 사랑을 재단하고 있었는지.
계획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내가 왜 그 동안 많은 사랑들을 놓쳐왔는지 깨달았다는 뜻이다.
사실 감성적으로 사는 김장우가 멋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와 결이 맞는 것은 나영규였다. 껍데기가 멋있는 사람.
(*이렇게 많은 입체적인 인물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것은 양귀자 작가의 힘이라고도 생각한다.)
그 동안 나는 어른의 삶을 계획대로, 그럴싸한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사랑 역시 머릿속으로 그녀와 나를 재고, 그럴싸한 계획을 세우고나서야 입을 열고는 했다.
나영규처럼 사랑을 했던 것이다.
보이는 순서에만 집착하게 되면 알맹이를 원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쉽게 사랑하고, 쉽게 실패하고, 다시 쉽게 잊었던 기억들이 떠올라,
잠시 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안진진은 자신을 둘러싼 진흙 투성이 세상에서도,
탐험해봐야 할 수많은 인생의 비밀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살아간다.
묵직한 그녀의 시선을 훔쳐보며 나는 스스로의 얕음을 자각하게 된다.
왜 내가 아직까지도 도망다니는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남기며, 책을 덮었다.
한 번도 삶을 진실로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모순 - 165p
모순, 양귀자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