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놈놈: 순친놈 썰친놈 만친놈
두 번째로 중국에 얼굴을 내민 지인은 바로 쥬주(같은 소리를 2번 반복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식 작명법을 따라보았다). 추운 것과 중국이 무섭지만 올해 새로운 것에 자주 도전하기로 다짐했다던 그는 조금 긴 망설임 끝에 하얼빈행 티켓을 끊었다. 그렇게 서안에서 출발하는 3인과 한국에서 오는 쥬주까지, 4인의 모허 탐사대가 결성되었다.
각종 감언이설을 해 가며 어렵게 네 명을 모은 이유는 하얼빈에서 모허로 갈 때 탑승하는 침대 기차 때문이다. 일명 '설국 열차'는 한 객실 당 이층 침대가 2개 있는 구조로, 일면식도 없는 중국인과 17시간 동안 살을 부대끼는 불상사를 피하려면 무조건 일행 네 명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쥬주는 첫 중국 방문임에도 17시간의 기차 이동 + 최북단 시골로 떠나는 난이도 상급 코스를 경험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는 모든 것에 의연하지는 못했다. 중국에 오기 전부터 보였던 각종 걱정과 높은 불안 증세가 지속되어 결국 '작은 심장'이라는 인디언 식 이름을 얻고 돌아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내내 잘 먹고 잘 웃고 잘 즐겨준 작은 심장(a.k.a 쥬주)에게 이 여행기를 바친다.
하얼빈에 도착한 바로 그날 저녁, 침대 기차를 타고 모허로 이동했다. 모허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의 최북단 지역으로, 중국에서 유일하게 오로라 관측이 가능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얼빈에서 모허까지는 비행기 이동도 가능하지만, 내 생에 그나마 젊은 날의 청춘을 즐겨보자는 생각으로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기로 했다.
낭만은 중국어로도 làngmàn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 浪(물결 랑)에 漫(흩어질 만), 물결이 흘러넘친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제한도 구속도 없이 자유롭게 요동치는 곡선의 모양이 연상된다. 더 빠르고 짧은 직선거리가 있더라도,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굽이굽이 돌아 다다르기를 택하는 것이야말로 낭만이 아닐지. 그렇게 우리가 탄 K7038 열차는 낭만을 가득 싣고 하얼빈 역에서 출발했다.
잠자는 시간을 넉넉 잡아 8시간을 빼더라도 우리에겐 9시간이 남는다. 구간에 따라 네트워크 연결이 아예 안 될 때도 많아서 대도시의 5G에 절여진 4인방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강제) 디지털 디톡스 덕분에 아날로그로 시간을 보내는 일—할리갈리와 원카드를 연거푸 하다가, 지루해지면 서로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고, 따뜻한 물을 떠 와선 재스민 차를 우리는—의 매력을 발견했다. 눈과 눈을 맞추고 서로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
역에서 사 온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고 내리 카드를 치다 보니 어느새 소등 시간이 되었다. 객실은 어둡고, 차창 바깥의 불빛은 눈꺼풀을 산란하게 스쳐가고, 덜컹거리는 열차의 리듬은 설핏 잠에 들면 몽롱하게 지워졌다가 깨면 다시 선명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감각이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아마도 객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누우니 내일 아침 모허에 도착할 때까진 그 무엇도 이 순간을 침범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안정감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와중에 선로가 겹치는지 우리 열차는 멈춰 서서 다른 기차를 보내고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무조건 내가 먼저 가기를 고집하는 게 능사가 아님을 다시 한번 배운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아, 고양이 세수를 하고 컵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복장을 단디 여미자 드디어 모허에 도착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가이드 겸 운전기사와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의 운전기사는 동북 지역 헤이룽장성 출신의 사나이로, 군인으로서의 이력이 어울리는 단단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차에서 하도 줄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불만이 올라오다가도, 여러모로 미친(?) 한궈런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애써준 것을 생각하면 그 불만이 쏙 들어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상한 놈들이었다. 막상 관광지 앞에 세워주면 내릴 생각도 안 하다가, 카페에 가자고 성화를 부리고, 10분에 한 번씩 순록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거기다 말썰매·눈썰매 각종 썰매를 태워달랬다가 급기야는 내 스스로 얼음을 지쳐서라도 타겠다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순(록에 미) 친 놈과 썰(매에 미) 친 놈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했다. 참고로 만(두에 미) 친 놈은 시도 때도 없이 만두를 먹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됐다.
어쨌든 순친놈과 썰친놈과 만친놈이 함께 하는 여행은 무척 즐거웠다. 별 것을 하지 않고 같이 있기만 해도 재미있었던 건 상성이 잘 맞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먹성이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 하나 짜증을 부리거나 지친 기색 없이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각자의 니즈(순록, 썰매, 만두)를 존중하는 문화와 하피(하얼빈 맥주) 많이, 음식은 더 많이!! 의 기조가 아니었나 싶다.
순록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순친놈의 염원이 하늘에 닿아 드디어 먹이 주기 체험을 할 수 있는 순록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농장 한편에 쌓여있는 녹용과 가죽 더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게다가 뿔이 잘린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방울방울 굳은 피를 달고도 다가와 먹이를 달라고 보채는 녀석을 보자니 더욱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한약 상자에 그려진,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녹용을 보면 그것이 한때 한 생명체의 머리 위에 돋아난 뿔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는 힘들다. 동물원에는 모든 동물이 살아 있고, 상점에는 어느 동물의 것인지도 모르게 잘 손질하고 포장한 고기만 가득하기에 도시에는 죽음이 없다던 말이 떠올랐다.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 『시간과 물에 대하여』)
그럼에도 나를 졸졸 쫓아오다가 이따금씩 앞발로 툭툭 치며 관심을 구하는 순록은 천진하고 귀여웠다. 이쯤에서 열심히 먹이를 받아먹는 순록과 기념사진을 남기는 일이 퍽 즐거웠음을 고백해 두어야겠다. 나도 참 어쩔 수 없이 모순적인 인간이구나 싶다. 그저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내가 지금 이렇게 좋은 만큼, 너희들의 삶에도 인간으로 인해 기쁜 순간 하나쯤은 있기를, 하고 바랐다.
모허에는 곳곳에 '最北 OO'이 많다. 최북단에 있는 집, 최북단 음식점, 최북단 우체국, 각종 '최북단'의 향연을 보며 이러다가는 최북단 화장실도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멋대로 그어둔 선일뿐인데 그것을 기준으로 최상급을 결정하는 것이 웃기기도 했다.
그래도 국경 초소 지역에서 제법 근엄한 경례 포즈로 기념 촬영을 하는 사람을 보며 그래도 중국인에게는 나름의 상징성이 있는 곳이구나 싶었다. 대부분의 의미는 누군가 부여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상징이 어쩌고 의미가 어쩌고 한껏 똑똑한 척했던 나도 큰코다친 일이 있다. 마지막 날 기념품 매장에 갔는데, 글쎄 모허 특산품인 블루베리로 만든 와인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1층에는 그럴듯한 양조 시설이, 2층에는 숙성 기간과 당도 별로 와인이 진열되어 있는 바람에 마음이 동했다.
아니 이건 맛이 없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일단 한 병을 사려는데 판매원이 다가와 이건 두 병을 사야 한다고, 여기서만 제조하고 판매하는 것이니 나중에는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한다며 화려한 영업 멘트를 늘어놓는다. 홀린 듯이 '한정판'이라는 의미에 빠져 냅다 두 병을 구매하고 말았다.
친구들에게는 오늘 한 병 마셔보자며 잔뜩 큰소리를 쳐놓곤 소중하게 이고 지고 하얼빈으로 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잔뜩 기대를 안고 마셔보았는데, 슬프게도 그건 와인이 아니라 그냥 감식초 향이 나는 無맛의 액체였다. (보관이 잘못되어 식초가 된 걸까?)
남은 한 병은 어쩌냐며 상심해 있는데 띵런이 그냥 중국 지역경제에 이바지했다고 생각하란다. 희한하게도 그리 생각하니 조금 괜찮아졌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하는데, 역시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인 것이다.
고상한 콘셉트로 준비했던 와인과 과일은 제쳐두고 재빨리 맥주와 양꼬치 모드로 전환하여 마지막 날까지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Fin.
서안 걸즈 + 쥬주가 함께한 3일간의 모허 여행 끝.
모허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