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귓속말
누구나 살아온 집에 대한 다양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종 조금 기괴한 추억이 있는 집도 있다. 나는 집이든 사람이든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뭐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의외로 자주 특이한 예외가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대략 20여 년 전 이사를 위해 아파트를 보러 다니면서 만났던 어떤 집의 첫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부동산 사장님과 처음 집 문을 열었을 때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그때는 막 장마가 끝난 7월 말이었는데 문을 열고 현관으로 발을 한걸음 들여놓자 왠지 낯설고 서늘한 한기 같은 게 몸을 감쌌다. 장마에 남아 있을 습기라 치기엔 너무 직접적인 한기랄까. 불길하기도 하고 피부에 닿는 감각이 꽤나 불쾌했다.
60평이 넘는 집이라 복도가 길었고 꺾어진 골목과 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구석이 많았다. 좌우 벽과 위아래 층이 막혀 있고 앞뒤로만 창을 낼 수밖에 없는 구조의 아파트라 평수가 커지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겠지만 심할 만큼 어둑어둑한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방을 둘러보고 복도를 지나며 몸에 솜털이 일어나고 머리털의 반절 정도가 쭈뼛 천정으로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을 떨치려 “집이 오래 비어 있었던 것 같네요”라고 부동산 사장님께 물었더니 “아뇨,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유난히 풍채 좋은 아주머니가 동행하셨는데, 표정이 썩 밝지 않으셨다. 그래도 엄청 넓은 집이었고 주변보다 싸게 나온 터라, 세간살이 들어오고 살다보면 괜찮겠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집으로 이사를 왔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 집으로 이사 후 많은 것을 잃었다. 식구 같은 강아지를 잃고 큰 돈을 잃고 집을 잃고 믿었던 사람마저 잃었다. 그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모든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지금도 가끔 생각해본다. 그때 그 집에 살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족에게 그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집을 잔잔히 휘감고 있던 기묘한 기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2년 넘게 여러 일을 겪은 후 결국 집을 내놓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지만 그 집에서 겪은 시간의 그늘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남았다. 그 그늘만큼 여러 가지 일이 꽤나 오래 엉켰던 바람에 우리 가족은 몇 년 더 마음고생한 후에야 안정을 찾게 되었다.
듣기 따라선 황당한 기담같이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집은 사람의 오감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그 경험 이후 나는 집이 어떤 고유의 기운을 가진 존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설계할 때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집에서 살았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좋은 기를 만들어보려고 애를 쓴다.
집의 복도가 길어 흐르는 벽이 많아지면 심리적으로 답답하거니와 그늘이 많이 생기게 되어 집 안 공기가 전체적으로 습해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환경적으로도 공기 흐름이 선적으로 흐르게 되어 기운이 모이고 빠질 때를 적절히 찾지 못하고 제자리에 맴돌면서 정체된다.
아파트의 대형 평형은 복도가 긴 평면 형태가 있는데 현관에 들어섰을 때 정면으로 복도 끝이 보이는 것은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긴 복도의 끝에 거울까지 두게 되면 현관에 들어설 때 왠지 집 밖으로 밀려나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구석진 공간이나 막다른 공간이 가급적 없는 집이 좋다. 미로 같은 좁은 길과 쓸데없이 동선이 많이 구부러지는 집은 안 보이는 사각지대가 많다. 자연스레 집 안 온기가 순환하지 못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냉한 구석이 생기게 된다.
사실 꺾어지고 구부러진 구석이 많다 해도 빛만 충분하다면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집이 커도 왠지 모르게 빛을 꼭 받아야 하는 부분에서 막히거나 시야가 터져야 하는 부분에 벽이 서 있거나, 안 보이는 구석이 생기게 되면 불길한 기운이 싹을 틔운다. 이런 집은 실내등을 다 켜거나 화창한 대낮에도 환한 느낌이 없다. 빛을 흡수해서 소멸시키는 블랙홀 같다고 해야 할까.
그 집을 처음 만났던 그날, 어머니와 나는 각자의 직감을 믿어야 했다. 그 집을 떠난 후 그간의 고생을 회상하며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그날 집 문을 열고 한 발짝 딱 떼는데 음습한 기분이 드는 거야. 현관 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복도 끝에서 부엌 쪽으로 검은 뭔가가 휙 지나가는 걸 봤어. 너도 봤니?”
글쎄. 이렇다저렇다 대답은 안 했지만, 솔직한 내 첫 느낌을 말하면 어머니가 본 것을 알 것도 같다.
한동안 비어 있었다는 그 집에 누군가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뭔가 있다.’
이게 그날 그 집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