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귓속말
스트라빈스키는 말했다.
“음악은 우리에게 ‘그냥 듣는 것’과 ‘주의 깊게 듣는 것’을 구분하도록 한다.”
그냥 듣는 것은 무엇이고, 주의 깊게 듣는 것은 무엇일까. 음악을 이렇게 세심히 구분해서 들어야 심오한 의미가 생기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가끔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에게 ‘그냥 사는 것’과 ‘주의 깊게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집이 실제로 존재하는 걸 보면 건축을 예술이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냥 산다고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흘려듣는 음악처럼 별생각 없이 흘러가는 삶보다는 한 곡 한 곡 관심을 기울여 음미하듯 사는 삶이 조금 더 충만하지 않을까. 그냥 사는 것과 주의 깊게 사는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집. 아마도 그런 집이 좋은 집일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집짓기를 하다보면 지금껏 살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가족과 함께 고민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게 될것이다. 함께 생각하고 대화한다고 또렷한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가족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 서로 물어보고 듣고 말하며 생각을 좁혀가는 시간은 의미가 있다.
내 집을 지을때 어머니는 집을 옷에 비유해 말씀하셨는데, ‘파티 드레스’처럼 요란한 집보단 집에서 평소에 입는 옷 같은 편안한 집이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를테면 ‘평상복 같은 집’이다. 일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책에는 ‘평상복 같은 주택’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 부분을 읽다가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평상복이란 특색 없는 옷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상과 현재를 드러내는 꾸밈없고 솔직한 옷이다. 비싸고 보기 좋아도 어울리지도 않고 편치 않은 옷이 평상복이 될 수는 없다.
기능은 최대한 편리하게, 공간은 가급적 상호 보완적이며 낭비가 없도록, 외부는 실내와 연장된 공간 개념으로 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수납은 많을수록 좋다. 벽은 필요한 만큼만 만들어 복잡한 복도나 어두운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게 한다. 벽량이 적으면 공사비 절감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밖에서 바라본 집의 형태는 땅과 서로 어울려야 하며, 가능하다면 단순하고 간결한 편이 좋겠다. 집의 기능과 공간의 분위기와 분리되어 별도로 혼자 튀는 외관은 장기적으로 볼 때 집의 품격을 저렴하게 만든다. 집 하나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들어 있고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집 구성원 각각의 생각과 경험, 꿈, 그리고 가치관이 종합된 결과다.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준다.
의도적인 공간을 만들어 삶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좋아하는 요소로 ‘우리’다운 게 뭔지 찾아가는 과정이 단독주택 설계다. 모든 방이 아파트처럼 꼭 남향일 필요가 없고, 마당의 크기와 위치 역시 어디에 두는게 가장 좋을지, 거실과 식당은 구분되어야 할지 아니면 합쳐져야 할지. 목욕하면서 타인 시선 방해받지 않고 작은 나무 한 그루 보고 싶은 소박한 희망도, 일요일 아침 지붕창에 쏟아지는 볕이 가득한 다락을 갖고 싶다는 바람도, 결국 집을 짓는다는 건 ‘우리’다운 게 뭔지 가족 모두 알게되는 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