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귓속말
내 집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할 수 없는 설계가 있다.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시공 리스크가 크다는 이유로, 식구들이 싫어한다는 갖가지 이유로 할 수 없는 설계. 이유는 많고 대개 절박하다. 한편, 건축가라면 죽기 전에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설계도 있다. 물론 그런 설계란 흔치 않은 행운과 완벽한 신뢰관계의 건축주, 넉넉한 돈이 만나야 실현되겠지만 말이다.
건축가 대부분은 욕망을 들키지 않고 설계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는 법을 스무 살 무렵부터 오랜 시간 훈련받는다. 훈련을 잘 받은 건축가라면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것쯤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가령 대단한 협상력의 건축가가 클라이언트의 혼을 쏙 빼놓는 이야기로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을 설계를 제안할 수도 있다. 이는 어쩌면 건축가의 욕망에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건축가가 만약 그 설계를 남의 돈이 아닌 자신의 돈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쉽게 판단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어쩌면 가장 좋은 설계란 내 집을 짓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설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식구들과 함께 생활할 내 집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작은 의견 하나도 심사숙고해서 가족 모두에게 적합한 답을 찾기 마련이니까. 간단한 결정이라도 내 입맛에 따라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시엔 수많은 건축물이 있다. 가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건축물들. 건축가 자신의 집이었더라도 저렇게 했을까 싶은 것들. 건축가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최선이 집주인에게도 최선은 아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건축가와 클라이언트가 바라보는 관점의 미묘함이란 설명하기 참 힘든 것이겠지만.
같은 일 하는 건축가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칫 예술가로서의 스페셜리티가 너무 희박해져서 평범한 집, 무난한 집만 만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내비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그 집에서 살아야 할 사람들의 현실을 고민해보고 내 집 짓는 마음으로 설계에 임하는 것이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집에 좀 더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 집을 지어 살다보니 클라이언트 입장의 고민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집은 절대 안 짓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어느 유명 건축가의 심정이 뭔지도 대략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또 한번 내 집을 짓게 된다면 믿을 만한 건축가에게 맡기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뭐든 잘하려면 한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경험자의 눈이 필요하다. 내 것이기에 시야가 좁아지고 결정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어디 집 하나 뿐이겠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