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귓속말
책장에 꽂혀 있는 새 책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책이 책장에 꽂혀 있는 걸 좋아해서 책을 자주 사는 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도 그런 편입니다”라고 맞장구 쳐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읽지 않고 그런 식으로 사다놓은 책이 꽤 많은 내 입장에선 그렇게 책 자체를 좋아하는 일이 더 본질적으로 책을 아끼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내는 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지만.
말하자면 내용이 어찌 되었든 글자가 무수히 쌓여 있는 풍성한 상태를 일차적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다. 그것이 책을 별로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에게 내가 종종 권하는 책과 친해지는 방법이다.
“괜찮아 보이면 일단 사세요. 대체 내가 이런 걸 읽을 날이 있을까 하는 책을 사도 상관없어요. 일단 사서 잘 보이는 곳에 예쁘게 꽂아두면 어느 날 갑자기 책 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그 책을 읽게 될 겁니다.”
눈인사만 하고 지내던 사람과 어떤 연유로 갑자기 친해지는 순간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하나하나가 언젠가 나와 깊은 대화를 나눌 인연들로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 같다.
언제나 여러 권의 책을 함께 읽고 있다. 한 권은 침대 맡에, 한 권은 사무실 책상에, 한 권은 갖고 다니면서. 이런 식으로 읽다보면 어떤 책은 서너 달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게으르고 끈기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겐 이런 식으로 조금씩이라도 읽어나가는 것이 좋은 독서법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사들이는 것에 비해 독서량은 적은 편이라 책이 쌓인다. 독서보단 책 자체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집을 짓기 전에는 책이 계속 늘어나서 책장은 계속 모자랐다. 이미 읽은 것, 비중이 떨어지는 것들을 골라 박스에 넣어두면서 버텼다. 박스 개수가 한계치에 다다르면 기부하거나 중고책방에 팔았다.
지난주엔 내년 봄 집 지으려는 분과 설계 상담을 했다. 이분의 집 짓는 이유는 순전히 책 때문이었다.
“책을 위한 집이 필요합니다.”
충분히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책의 입장에서 보면 답이 안 나온다는 말씀이다. 내가 답했다.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가끔씩 책더미 속에 머물고 싶어서 도서관에 간다. 책을 읽는 시간은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제례, 기도, 명상과 닮았다. 책의 공간은 막혀 있지 않는 편이 좋다. 작은 집이라면 벽과 별도로 분리된 책장보단 벽 자체가 책장이 되는 방식이 좋을 것이다. 책장은 조금 넉넉하게 계획되어 책 사이사이로 틈이 생기는 헐거운 여유가 책과 읽는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완화시켜주지 않을까.
책 있는 집의 미덕이란 이런 것이다. 책과 사람 사이에 쉴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내는 것. 사람 사는 집이라면 어떤 집이든 이런 느낌을 주는 작은 여백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여백 가장자리에, 책이 놓인 작은 구석에 앉아 책의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