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귓속말
설계 진행 중인 집들 이름은 가급적 건축주가 짓도록 한다. 내 집에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단순히 명칭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집과 그 집에 살 사람간의 교감, 접점을 의미한다. 간혹 계약전 예비 상담하러 와서 이미 집 이름을 다 지어두었다는 분들도 있는데, 반면 집을 다 지어놓고도 잘 모르겠다며 이름을 지어달라는 분도 계시니 그간 설계하며 집 이름에 얽힌 기억을 떠올려보는것만으로도 여러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급속한 근대화, 현대화를 통과하며 어쩔 수 없이 쓸려나간 수많은 집, 터 위에 세상은 빠르게 아파트 공화국을 지었다. 이제 집의 의미를 물으면 내 집이 얼마짜리인지를 말한다. 의미가 돈이 된 것이다. 집의 이름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대신 'OO아파트 몇 동 몇 호’라는 브랜드명과 익명의 번호가 훨씬 더 중요하다.
현관 문에 붙은 번호를 집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름없는 집에서 산다. 우리는 내 삶이 세상이 정한 평균 속에서 튀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유지되야 한다는 불안과 손해보면 안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름 없는 집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개개인의 철학과 취향, 개성 보다는 세상이 정한 뭔가에 모두가 획일화되는 삶을 의미한다.
남양주시 마현마을에 가면 긴 세월 유배 생활을 한 다산((茶山))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與猶堂))’이 있다. 유배를 마친 정약용이 남은 생을 살며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한 집이다. 집 이름의 의미는 노자의 『도덕경』 15장의 한 구절인 “여((與))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하고, 유((猶))가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는 대목에서 차용했다는데, 젊은 날 방자했던 혈기를 반성하며 몸가짐을 조심하며 살아간다는 삶의 자세를 집 이름에 담고자 했다.
책만 읽는 바보라는 의미의 간서치((看書癡)) 이덕무는 평생 읽은 책만 2만 권이 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집 이름 ‘팔분당((八分堂))’에서 그 생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레벨인 ‘성인’을 10으로 볼 때 8이라도 이루자라는 의미로, 그가 왜 그리 무지막지하게 책 읽는 생을 보냈는지 짐작케 한다.
담헌((湛軒)) 홍대용의 당호((堂號))는 그의 호인 ‘담헌’이다. 담헌은 ‘맑은 집’이라는 뜻으로 세상살이에 심신을 더럽히지 않고 맑게 살겠다는 소망이 드러난다. 이름값 하려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홍대용은 보기 드물게 평생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면서 학자로서 명성을 높였다.
한편 연암((燕巖)) 박지원이 경상도 함양고을 현감으로 부임해서 지은 집의 당호는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이다. ‘연꽃에 바람 불고 대나무에 이슬 내린다’는 짧은 시 같은 이름이다. 연암은 높은 문학적 감수성으로 대나무에 구슬이 구르듯 이슬 내리는 새벽을 즐기고자 했고, 연꽃잎 날리는 아름다운 아침을 만끽하면서 풍류와 즐거움이 있는 선정을 백성과 함께 나누기를 원했다. 확실히 꿈보다 해몽이긴 하겠지만 하나의 시문처럼 느껴지는 매력적인 당호임엔 틀림없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이름’을 불러주자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 누군가의 시를 떠올린다. 집 이름을 짓는 건 어설픈 몸짓에 불과했던 내 삶에 중요한 의미 하나를 부여하는 일이다. 지난주 인허가 끝내고 다음달 착공을 기다리는 주택의 이름은 연주가인데, 설계 시작하는 첫 미팅때 건축주가 집이름 지었다며 뿌듯하게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몇년전 땅도 없을때 미리 지어놓으셨다고. 내 집을 짓고 싶어서 이름을 먼저 지어놓은 케이스랄까.
5년전 지은 내 집 이름은 미생헌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다가올 완생을 준비하는 집. ‘미생헌(未生軒)’. 이름 짓느라 집 짓는 몇달간 이럴까 저럴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보다 한뼘 정도는 완생이 되었을까 아님 오히려 한뼘 더 완생과 멀어졌을까. 여튼 완생이 될리는 영원히 없을테니 이름 하나는 잘 지은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