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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시작은 땅으로부터

집의 질문들

by 최소장


몇년전 어떤 클라이언트가 질문 하셨다.


" 일전에 티비에서 유명 건축가의 강연을 봤는데 설계를 하기전에 먼저 땅과 대화를 시작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땅을 둘러보다가 말을 걸면 땅이 뭐라 뭐라 한다던데... 소장님도 그러세요? "


땅도 나름데로 건축가 명성을 보고 답을 해줄지 말지 정하는지는 모르지만 내 생각엔 땅에게 뭔가 물어본들 주변 차소리나, 바람소리.. 말고 뭐가 들릴지는 알수 없기에, " 말을 건적은 없고 땅을 둘러보다보면 뭔가 방향이 잡히는 경우는 많지요 " 라고 답했었다.


물론 땅 입장에서도 건축가 명성을 보고 사람 가린다면 할말은 없다만 막상 땅과 대화하는 건축가를 본다면 뭔가 무속, 사이비 느낌일거 같아서 좀 무서울거 같긴하다.


설계 시작을 위해 처음 땅을 보러 갈때는 아무생각 없어보이는 그 땅들이 무뚝뚝한 공무원이나 물어도 별 대답없는 사춘기 애들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명당 잘 찾는 도사 수준의 지관처럼 땅에 발을 딛고 기운을 좍 느끼면 이 땅에 뭘 해야하는지 뭐가 세워져야하는지... 한방에 느낌이 온다거나, 클라이언트가 티비에서 봤다는

건축가처럼 땅이 하는 말이 들리는 경지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내 입장에서 땅이란 늘 말을 도통 하지 않고 감정 표현이 없어서 눈빛과 표정으로만 읽어야 하는 까다로운 당신같은 존재였고, 새로운 당신을 만날때마다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내야 하는 쉽지 않은 텍스트였다.


건축가에게 땅은 화가의 캔버스, 혹은 쉐프의 식재료같은 것이다. 장차 지어질 건축물의 상당 부분이 땅에 의해서 선택되고 결정지어진다. 해서 건축가가 땅을 어떻게 읽는지, 해석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등은 꽤 중요할수 있다.


나는 건축과 땅의 관계를 무대와 배우의 관계로 본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며 건축을 하진 않았지만 최근 10년간 수십개의 집을 의뢰받고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보는 사람이라는 걸.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좋았던 지점은 배우의 연기나 사건보다 무심히 흘러가는 일상의 흐름을 통해 영화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었는데, 주인공인 히라야마(야쿠쇼코지)의 표정과 대사까지 배우의 것이 아니라 무대나 배경처럼 구조적인 요소로 처리한 연출이 감탄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건축과 땅의 관계 역시 비슷하다. 의뢰받은 프로젝트에 따라 건축이 배우여야 할지 무대가 되어야할지 부터 고민한다.


예전엔 건축이 배우고 땅은 무대라는 생각이었다면 점점 건축이란 항상 돋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야쿠쇼코지의 연기처럼 극 전체의 무대나 배경같은 역할을 할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말하자면 건축가 구마겐코가 말하는 땅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적인 건축 같은 것인데, 그의 저서 약한건축(弱い建築, Weak Architecture)이라는 책을 보면 건축과 자연이 서로

싸우지 말고 경쟁하거나 승부를 내는 것이 아니라 공생할 방법을 찾자고 말한다.


실제로 구마겐고가 설계한 도쿄의 네즈미술관에 가면 도심의 번잡함이 갑자기 사라지고 멋들어진 대나무 진입로와 아름다운 정원이 건축과 스며들듯이 하나의 흐름속에 존재하는 기분좋은 장소를 만날수 있다.


건축이 돋보여야 하고 땅은 배경일 뿐이라는 생각은 종종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혼자만 잘난 뭔가를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아무리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이라도 땅을 무시하고 혼자 날뛰는 경우라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고개를 절레 절레 젖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은 땅을 점령하지 않고 땅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며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은은한 멋을 풍기는 건축이다. 배우로서 역할과 뒤로 물러나 기꺼이 극의 배경이 되어주는 역할을 기꺼이 모두 수행하는 <퍼펙트 데이즈>의 배우 야쿠쇼 코지처럼.


그런 이유로 나는 땅을 처음 보러갈때는 장차 지어질 건축물을 상상하면서, 뜬금없게도 배우와 무대의 관계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대입해보곤 한다. 땅을 밟아보며 스킨십도 시도 하고 땅 주변 환경과 분위기를 몸으로 느끼고 땅에 깃드는 볕 그림자를 가늠하고 지형을 보고, 땅에 엮여있는 건축법도 체크하면서, 친해지기 위한 나름의 공을 들인다. 하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누구처럼 땅에 말을 걸고 대화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면서.


결국 건축가에게 중요한건 땅을 읽어내는 '나만의 감각' 이 아닐까.


건축은 땅으로부터 시작하고 땅에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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