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감옥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살고 있는 세상은 거대한 감옥이었다. 그는 바다로 알고 있던 감옥 속 호수 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하늘이라 믿었던 것이 나를 가둔 벽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벽 문을 열고 나가면서 자유를 찾게 된다. 영화는 현실과 가상, 자유와 구속의 경계를 드라마 세트장의 벽으로 표현했다. 피터위어 감독은 말한다. 우리에게 진짜 벽은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의 환상 이라고.
예전에 어떤 자리에서 건축은 ‘ 거대한 감옥 안에 또 하나의 감옥을 짓는 것’ 이라고 했던 적 있었는데 트루먼 쇼 때문이었는지, 누구와의 대화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때의 나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 시대의 건축가란 생존경쟁 자체인 정글 같은 세상을 매일매일 헤쳐 나가면서, 위협과 불안감을 느낄지 모를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자발적인 구속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자유를 위한 나만을 위한 감옥이랄까.
감옥 안에 또 하나의 감옥을 짓는다는 의미를 좀 풀어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건축가는 ‘ 벽을 그리는 사람 ’ 이다. 벽이 없던 빈 땅에 벽을 그려 필요한 만큼 공간(의뢰인이 원하는)을 한정하는 행위가 건축이라는 얘기... 해서 그런 식으로 벽과 벽의 여러가지 조합의 결과로 만들어진 집은 그것이 ‘ 거대한 감옥 속의 또 다른 감옥’ 이든 뭐든 간에 그것을 의뢰한 거주자에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벽은 중요하다. 건물을 만드는 단순한 구조체의 의미를 넘어, 거주자든 외부자든 사람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특히나 무언가(無言家)의 의뢰인 처럼 외부 시선을 완전히 차단하고 싶은 집을 원하는 경우는 더더욱 벽의 활용에 대한 여러 고민이 필요해진다. 의뢰인이 완전히 막아 달라 해서 사방을 다 막고 창도 거의 똟지 않고 오로지 내부 중정으로 시선과 동선을 제한시킨다면 프라이버시는 완벽하겠지만 진짜 감옥 같은 집이 된다. 프라이버시만 완벽해지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안전한 감옥을 짓는 게 일생일대의 목표인 사람이라면 모를까, 앞서 스미요시 주택의 예를 볼 때 사람이 그런 공간에서 얼마나 버틸지는 알 수 없다.
벽의 마음
무언가의 벽은 다양한 방식으로 디자인 되었다. 벽도 다 같은 벽은 아니어서 경계를 구분 지을 때 차단의 목적에 따라 벽 높이를 조절하면 된다. 높이가 낮아지면 담이다. 벽은 단절과 고립, 영역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지만 담은 벽보다는 조금 낮은 단계의 단절과 분리를 위한 것이고, 원하는 만큼 보여주고 원하는 만큼 가리고 싶을 때 유용하다. 담이 잘 사용되면 심리적으로는 보일랑 말랑한 커튼의 느낌과 비슷해지고 담의 윗 공간을 가리냐 안가리냐에 따라 담이 있어도 거의 열려있는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언가의 담은 얕은 담이 있고 높은 담도 있다. 얼마나 차단할건지에 따라 정할 수 있고 담의 재질 따라 외부 시선에 대해, 무례하지 않은 단절과 소극적인 호의를 표현할 수도 있다. 무언가의 겉모습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벽과 담의 조합이다. 경계를 짓되 담과 벽 사이의 거리를 벌려 레이어가 겹쳐 보이는 공간의 심도가 생기면 심리적으로 덜 답답하다. 결과적으로는 실내와 바깥은 완벽히 분리된 벽이지만, 시각적으로는 적절히 열리고 닫혀있는 복합적인 느낌... 프라이버시는 최대한 보호하지만 주택의 외관이 꼭 삭막한 벽처럼 보일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가 원하는 집은 외부와 무작정 차단된 공간이 아니라 불편한 시선만 적절히 걸러지는 여과(필터)의 공간이었으니까.
주택에서 벽과 담의 의미를 탐색하다보면, 집은 단순한 거주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심리를 반영하는 반사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벽을 세울 것인가.. 어떤 담을 쌓을 것인가의 선택 문제에서도 사람마다 각자 성향과 삶의 태도는 반영되기 마련이다. 완전히 닫힌 벽을 선호하는 사람은 안정감과 고독감 사이에서 고민하고, 반대로 열린 담을 선호하는 사람은 관계와 소통을 중요하게 여긴다. 가변적인 벽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정된 생활을 좀 따분해하며 변화있는 삶을 선호하고, 움직이지 않는 고정 벽이 좋은 사람은 예측 가능한 현실이 불확실한 미래 보다 좀 더 편안하다. 물론 벽 하나로 사람 심리를 다 설명할 수는 없는거겠지만.
하이데거는 그의 책 <건축.거주.사유>에서 ‘ 거주란 단순한 머무름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 이라 말했다. 아마도 그가 생각하는 집은 단순한 물리적 구조물이 아닌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일종의 매개체라는 의미가 아닐까. 확실한거 하나는 우리가 흔히 ‘건축을 본다’고 할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사실상 온통 벽이라는 사실이다. 뚫린 벽과 막힌 벽, 낮은 벽과 높은 벽, 투명한 벽과 불투명한 벽, 따뜻한 벽과 차가운 벽... 사람이 건축과 만나는 접점은 벽이다. 벽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