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땅과 작은 집
땅이 작으면 설계를 건축법이 다 해주는 느낌이 든다. 법이 시키는데로 대지경계선에서 건물이 띄어야 하는 이격거리, 일조건 사선제한, 주차공간....를 적용하다보면 남는건 최소한의 마당. 땅을 꽉 채우는 가상의 2층 짜리 박스를 넣고 건축법이 개입을 시작하면 박스는 사방으로 쪼그라들고 사선에 잘리고 주차 공간에 밀리고... 하다가 대략적인 집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건폐율 얼마, 용적율 얼마가 있더라도 이렇게 하다보면 막상 그 면적 다 찾아 먹는 건 쉽지 않다. 건축법이 만들어준 이 못생긴 덩어리에서 진짜 설계가 시작된다. 옴짝달싹 어려운 타이트한 땅 위에 법규가 만들어 놓은 거친 덩어리들이 얼마나 납득되는 공간과 형태로 환골탈퇴 하느냐가 건축가의 할 일이다.
반면 땅이 넓으면 어떨까. 비좁은 땅의 못생긴 덩어리에서 시작하는 경우 보단 훨씬 자유롭고 즐거운 설계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또 이건 이것 데로 만만치 않다. 가령 200평쯤 되는 전망이 확 트인 넓직한 땅이 있다. 여기에 40평짜리 2층 집을 짓고 싶다는 누군가의 요청으로 땅을 보러 갔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봤던 계단식 고랭지 논밭 같은 땅 20여개가 모여있는 단지였다.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임야면 땅값 자체는 꽤 저렴할 것이고 제법 경사 있는 임야를 계단식 대지로 만들었으니 토목 비용은 꽤 들어갔을 것이다.
여튼 주어진 과제는 200평 땅에 40평 집. 이미 지은 이웃집들 보니 다 고만 고만한 2층집이다. 20평~25평 1층을 두 개 층으로 쌓은 흔한 2층 목구조 주택들. 문제는 건물이 차지하는 땅을 빼면 각 집 마다 남는 땅이 180평이라는 것. 여유롭다 못해 황량한 느낌이었다. 200평 땅에 40평짜리 박스를 올려놓으면 박스가 굴러다닌다. 옴짝달싹 못하는 60평짜리 땅의 60평 집과는 풀어내는 어프로치가 다르다. 그림으로 치면 그려야할 캔버스가 넓어진 것이다. 캔버스를 꽉 채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를 채우고 어디를 비울지, 채움과 비움의 방식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변 이웃집들 보니 대략 옹벽에 가까운 곳에 붙여 2층집을 놓고 나머지를 모두 비워놓는 배치를 했다. 건축학과 1학년들이 건축계획 각론에서 배우는 일반적 효율과 기능에 충실한 배치다. 집은 컴팩트하게, 집을 뺀 나머지는 마당...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바깥 공간을 과연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인데, 그런 집이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잔디 깔거나 적당한 나무 몇 그루 심고 땅 테두리엔 조잡한 문양이 들어간 기성 단조 난간을 설치한, 아니면 그 조차도 하지 않고 그냥 텅 비워둔... 쉽게 말해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남겨둔 느낌이랄까. 커다란 빈 땅들이 그에 비해 너무 아담한 집과 데면데면하게 놓여있었다.
단층집이 어울리는 땅
땅이 넓어 좋은 거 하나는 옆 건물의 간섭이 없다는 것. 땅이 좁으면 내 집과 옆 집의 틈새가 붙을랑 말랑한 긴장 속에 대립하게 된다. 땅이 넓으면 옆집이 저 멀리 있다. 그 집에서 뭘 하는지 잘 보이지 않으니 이웃간 불필요한 긴장감이 없어 좋다. 떨어진 거리만큼 프라이버시는 별 문제가 없고, 이웃 집에 가려진 그늘과 답답함이 없으니 좋다. 사방을 둘러봐도 시야는 트이고 볕은 온전히 내 집을 비추고, 이웃의 소음도, 냄새도 거의 느낄 수 없다. 타인과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거 자체가 스트레스인 도시의 집과는 사뭇 다른 비도시 지역만의 호사랄까.
이런 땅엔 굳이 도시의 좁은 땅과 어울리는 2층집을 지을 필요가 없다. 평지의 땅도 아닌 계단식 구릉의 땅이므로 땅에 서있어도 2층, 3층 이상의 시야와 개방감은 이미 충분하다. 단층 주택이 답이었다. 각층 20평짜리 비좁은 2층집 보다는 40평짜리 단층집이 풍요로운 공간을 만들어준다. 의미없이 텅 비워진 마당이 아닌 쓰임새가 조금씩 다른 아기자기한 외부공간을 조성하는 것도 단층주택일 때 더 활용도가 높아진다.
여기까지 고민하다가 설계 기준이랄까, 굿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주변 이웃집들과 반대로 하기 ‘ 가령 옹벽에 붙여 집을 짓지 않는다. 굳이 높게 막힌 벽 앞에 집을 놓을 필요가 있을까? 2층집 보다는 단층집이 더 어울린다도 마찬가지다. 단층집도 충분히 여유로운 환경에서 굳이 2층을? 마당도 이웃집들처럼 꼭 하나일 필요가 없었다. 큰 마당 하나보다는 자잘한 작은 마당 여러개가 낫지 않을까. 그냥 아무생각 없이 비워놓고 ’마당‘ 이라는 건 너무 무성의하다. 쓸만한 크기로 잘라서 각각의 역할을 주는 외부공간이 있으면 집의 일상은 좀더 풍요로워진다... 등등. 이웃집들을 무시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집은 집마다의 생각과 의도가 다 있는 것이므로, 우리도 주어진 땅의 환경과 상황을 잘 보고 우리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가자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