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patio)
인사동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1924년에 개업했다는 통인화랑.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명소 중 하나다. 전면 2층짜리 한옥 파사드는 최근에 지어진 것, 그 뒤 7층짜리 건물은 1974년에 지어진 것, 다시 그 건물 뒤는 1924년 버전 한옥의 고즈넉한 흔적이 남아있다. 대략 3개의 시공간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랄까. 통인화랑을 좋아하는 이유는 건물뒤에 가게와 연결된 한옥과 그 사이의 작은 중정(마당) 때문이다. 앞에 건물은 대략 30년전 지은 것이고 그 이후에 뒷편 한옥을 사들여 마당과 채를 건물과 연결했다.
인사동처럼 땅값 비싼 상업지역의 일반적 건축 논리였다면 매장면적 늘리려고 오래된 한옥, 마당은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지었겠지만 통인화랑은 다른 접근을 선택 했다. 100년전 한옥과 작은 마당을 잘 보전하여 기존 건물과 연결하는 시도는 한옥과 마당의 전통 풍경과 분위기를 본 건물까지 확장하여 통인화랑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관광객과 행인으로 늘 번잡한 인사동 분위기와 완전히 대비되는 은밀한 내향적 공간이다. 소음 가득찬 거리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이 곳에 오면 가쁜 숨은 차분해지고 인사동의 참 맛이 느껴진다.
소란스러움에서 조용함, 동적 환경에서 정적 환경으로 순간 이동하는 이런 느낌을 좋아한다. 공간적 변화가 주는 강렬한 대비 때문이다. 소음 가득한 복잡한 길거리에서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선다. 실내의 물건들과 작품을 구경하며 몇 걸음 떼다보면 거리의 소음은 잦아드는데 그러다 시야가 트이는, 예상치 못한 작은 정원을 만나는 것이다. 그 순간 감각이 확 열리면서 건축적 도파민이 샘솟는다.
바깥의 소란스러움은 외부의 세계, 즉 ‘타인’과 ‘사회’를 상징한다.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는 과정은 마치 의식의 전환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갑자기 펼쳐지는 조용한 정원은 일종의 ‘내면의 공간’처럼 작용하면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원하던 고요와 명상의 순간을 제공한다.이런 공간적 경험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뿐 아니라 날씨, 소리, 빛 같은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 완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순간에 단순한 ‘예쁘다’ 이상의 감동을 받는 것이고.
영화에서 ‘시퀀스(sequence)’ 라 불리는 장면의 전환 기법처럼 건축가는 영화감독처럼 공간의 장면을 계산하여 단계적으로 경험하게 설계할 수 있다. 빌라 파티오의 중정은 이런 계산이 포함된 공간이었다. 공사비와 기능, 동선 등 이런 저런 현실적 판단의 결과로 단층집으로 방향이 잡혔지만 평범한 집 외관과 대비되는 소박한 ‘스페셜리티’가 집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겉과 속이 다른 집을 의도한 것이다.
인사동의 통인화랑, 북촌과 교토를 산책하며 경험했던 조용한 정원들을 떠올렸다. 바깥에선 전혀 알 수 없었던 진공 상태처럼 느껴지던 작고 은밀한 공간들. 그 결과 빌라파티오는 바깥의 마당과 내부의 중정이 실내공간을 앞뒤로 에워싸는 집이 되었다.
공간들
중정 계획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중정을 에워싼 집의 높이였다. 설계 의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집 내부에 숨어있는 중정은 외부 시선을 확실히 차단하는 프라이버시 보장은 물론이고, 집 실내 안쪽 깊은 곳 까지 양질의 채광과 환기를 유입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에워싼 내 집이 너무 높아 갑갑하고 폐쇄적 분위기가 되어버리는 중정이라면? 늘 그늘지고 바람도 안통하고 겨울엔 볕도 잘 안 드는 음습한 공간이라면... 이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적절한 중정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 높이와 채광 각도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지붕 기울기가 집 바깥이 아닌 중정 안쪽으로 설계된 이유다.
40평 실내공간을 ㄷ자로 펼치고 ㄷ자 중앙에 중정을 끼우면 집이 점유하는 땅 면적은 60평 정도다. 거기에 거실, 주방과 연결되는 바깥 외부 테라스를 낮은 담으로 구획해서 집에 연결하면 시각적으로 체감되는 집의 영역감은 거의 80평 수준으로 확장된다. 실내 공간은 40평이지만 맨발로 돌아다닐 수 있는 중정 20평과 마당 역할을 하는 외부테라스 20평이 더한 것이다.
빌라 파티오의 실내 동선은 중정을 중심으로 한 순환 구조다. 전면 조망과 채광이 좋은 거실과 주방은 남측을 면하게 하면서 테라스를 붙이고, 침실은 중정과 면하게 하면서 뒤로 뺐다. ㄷ자 양 날개는 각각 아이들 침실과 부부 침실이다. 중정(patio)을 사이에 두고 부모와 아이들이 방이 마주보면서 여차하면 중정을 가로 질러 맨발로 언제든 오갈 수 있게 했다. 비오는 날은 쉽지 않겠지만 눈오는 날은 특별한 재미가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집 내부와 중정을 아무렇게나 뱅글 뱅글 돌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며 설계했다.
부부 침실과 아이들 침실 위에는 각각 다락을 두었는데, 각각의 다락은 공중 다리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다락을 통해서도 뱅글뱅글 돌아다닐 수 있다. 단층집이지만 작은 다락이 있으면 오르내리는 즐거움이 생긴다. 이런 즐거움은 공간적 활력이고 일상의 재미다. 또한 단층이더라도 지붕 기울기를 활용하면 내부 층고를 높여 거실, 주방은 꽤 높은 층고를 만들 수도 있다.
싸고 좋은 집, 실제 평수 비해 넓게 느껴지는 집, 유지 관리 편한 집, 튼튼한 집, 가족 모두에게 다양한 재미를 주는 집.... 단독주택 설계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슈들을 절충하며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가려내는 과정이다. 그 과정의 결과 하나의 ‘ 집 ’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