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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장 Aug 03. 2022

집짓기와 밥짓기

집의 귓속말

집 짓기를 밥 짓기로 비유해보자. 집의 첫 이미지를 떠올리고 스케치를 하고 집의 전반적인 것들을 구상하는 시간은 쌀을 씻고 찌꺼기를 걷어내고 물의 양을 맞추는 시간이다. 땅 하나에 만들 수 있는 집의 유형은 몇 개나 될까. 건축설계를 배우던 시절 선생님들은 그 수가 무한대라고 하셨다. 누가 그 집에 사는지, 누가 그 집을 설계하는지에 따라 수많은 다른 유형의 집이 가능하다는 말씀.


그런데 막상 설계 실무를 하다 보니 그 개수는 늘 서너 개에 불과했다. 땅이 정해지고 거기 살 사람이 정해지고 건축가가 설계를 시작한다. 설계비가 정해지고 돈에 맞추어 일정이 정해진다. 모든 일이 그렇듯 돈과 시간은 정량적으로 재단되어 업무량으로 규정되고 그에 맞춰 지극히 자본주의적 논리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통상 설계 초반 작업에서 대안 하나가 빠르게 만들어지고 건축주를 불러 협의하고 고칠 부분과 추가될 부분, 뺄 부분을 정리하면 설계의 큰 방향이 만들어진다. 건축가들은 대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안 하나를 건축주에게 설득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물론 여러 개의 대안으로 선택의 폭을 넓혀 결정을 신속하게 유도하는 방법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국 돈과 시간 싸움이 된다.


설계의 초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집의 배치와 주요 공간의 기능, 공간 간의 상호관계, 그리고 집주인의 세세한 요구사항이다. 이 단계에서 이렇게 저렇게 그려보면서 정리되는 건축가의 스케치는 집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결과물이 된다. 집의 개념과 전체적인 얼개가 여기서 결정된다. 그러니 집이 제대로 되려면 이 단계에서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할 시간, 다양한 생각과 변덕을 그림과 모형으로 확인하고 재고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내 경우엔 땅 고르느라 고민하다 시간을 많이 쓰는 바람에 막상 본격적인 설계 시간은 석 달밖에 없었다. 하지만 땅을 살까 말까만 고민한 게 아니라 땅을 검토하며 자연스레 집의 대략적인 대안들과 문제점들을 확인했다. 설계 초반 과정의 중요 항목들을 땅을 고르며 충분히 정리한 셈이다.


그렇게 땅을 계약하고 나니 계약 전 적절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생각하고 걱정했던 자잘한 고민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계약 전엔 괜찮다 싶어 열심히 스케치하고 모형까지 만들고 나면 그제야 이런저런 단점이 눈에 띄고 다시 원점에서 고민하는, 그런 과정을 일주일에 한 사이클씩 계속 되풀이했고 급기야 더는 할 수 없어 완전히 막막한 기분이 드는 와중에 계약을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도장을 찍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다. 무슨 일이든 도장을 찍어야 쓸데없는 고민이 사라지는 법이다.


대충 그린 스케치 몇 장엔 집 하나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가 다 들어 있다. 펜으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은 설계자의 머리에 상상의 스케치로 저장된다. 집의 방향, 햇빛의 움직임, 창의 위치, 계단과 동선의 처리, 공간들의 적절한 크기, 합리적인 공사비……. 장차 집에 펼쳐질 다양한 생활의 풍경까지. 빠르게 그리다보면 평면적인 그림은 머릿속에서 3차원의 영상으로 구체화 되고 그 안에 어느덧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원래 충분한 시간 동안 그리고 찢는 일을 반복하다가 이 정도라면 후회하지 않겠다는 대략적 결론에 닿아야 끝나는 것이다.


혹시 어떤 건축가에게든 내 집을 맡겼다면 아무쪼록 충분히 숙고할 시간을 주시길. 칼국수나 수제비도 아닌데 도면 빨리 잘 뽑아달라거나 떠 달라는 분들이 여전히 많은 현실이다. 빨리 설계하라고 재촉하는 건 평생 한 번 짓는 내 집, 대충 생각해서 그려달라는 것과 같은 말이니 부디 숙고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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