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참 걷기 좋은 날이네요

서울 사는 17년 차 직장인의 무작정 걷는 이야기

by 리앙

"오늘 참 걷기 좋은 날이네요."


유난히 쨍한 날이 있어요. 미세먼지 하나 없고 하늘이 파아란, 그런 날요. 그럴 땐 왠지 한강다리를 걷고 싶어요. 우리 집에서 회사까지는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려요. 자전거 타면 30분, 지하철 타면 10분도 가능하죠. 이렇게 날이 좋은 날엔 아침 일찍 서둘러 출근준비를 해요. 걷고 싶어서요.


한강 위에서 부는 씨원~하고 강력한 바람을 맞아본 적 있나요? 그거 중독성이 있어요. 한번 맞으면 담에 또 맞고 싶어 져요. 물론, 나를 향해 달려오는 차들(운전자들의 시선, 특히 차 막힐 때)이 불편할 때도 많지만 뭐 어때요. 한번 보고 말 사람인데.


이때 고민은 가방이에요. 배낭을 메면 걷기 편하긴 한데 옷맵시가 안 나고, 예쁜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가자니 손에 줄레줄레 들고 갈 짐이 많아져요. 대중교통을 타긴 싫고 바깥공기를 맘껏 쐬고 싶은데 차마 이 짐을 다 들고 갈 자신은 없는 그런 날은 자전거를 타요. 자전거 바구니에 온갖 짐을 쑤셔 넣고 씽씽 달려요. 사실 전 따릉이 마니아예요.


하늘이 시무룩하고, 어둑어둑 곧 비가 올 것 같은 날이 있죠.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날씨예요. 전 비 맞는 것도, 비 보는 것도 좋아하는데요. 그중 제일은 비 오기 직전의 꾸물꾸물 습기 가득한 날이에요. 왠지 그런 날에는 빗방울 떨어지기 전에 얼른 나갔다 와야겠다 싶어요.


그러다 우연히 비를 맞게 되면요? 신나게 비를 맞아줘야죠. 놀란 척하고 근처 커피숍 가서 커피 하나 마실 시간이 있으면 더 좋고요. 그치만 워킹맘에겐 그럴 여유는 거의 없어요. 비 오는 날 애들 우산은 다 챙겨주고, 막상 내 우산은 안 챙기는 게 엄마들이거든요. 아 이건 시간이랑 상관없나요. 여하튼 전 비가 올랑말랑, 자연 가습된 요런 날이 좋더라고요. 이럴 땐 그냥 아무 데나 걸어요. 동네든 어디든 막 쏘다니며 걸어요.


걷기 제일 좋은 계절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가을, 바로 지금인 것 같아요. 사실 전 더위를 잘 안 타서 여름에 걷는 것도 전혀 문제는 안 돼요. 다만 기미와 검버섯이 걱정될 뿐이죠. 사실 남편 몰래 200만 원어치 피부과 시술을 받았는데 뙤약볕에서 걷다가 다시 기미가 올라오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그래서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는 잘 안 걸어요. 안 그래도 까만데 더 까매지면 밤에 안보일까 봐서요. 그래서 봄가을에 열심히 걸어서 비타민D를 축적해 놔요. 요즘 같은 때가 딱이죠.


전 추운 건 극혐이에요. 정말 싫어요. 수족냉증이라 사시사철 손발이 시렵거든요. 그치만, 옷 따습게 입고 걷는 건 좋아해요. 추운 겨울날 이불 뒤집어쓰고 먹는 아이스크림처럼, 한여름에 에어컨 세게 틀어놓고 솜이불 덮고잘 때처럼 기분이가 좋아요.


특히 남편이 진짜 진짜 싫어하는 엄청 오래된 롱패딩이 있는데 그거 입고 걸으면 너무 기분이 좋아요. 사실 그 옷은 7만 원 주고 산 카키색 저렴이 롱패딩인데, 남편은 그 옷 입고 어디 나갈라치면 소스라치게 싫어해요. 그치만 전 그 옷이 좋아요. 가볍고 포근하고 뭣보다 엄청 크거든요. 안에 이것저것 쑤셔 입어도 절대 티 안나는 마법의 옷이에요. 그래서 절대 버릴 수가 없어요. 여튼 이 옷은 아마 몇 년 후에도 제 장롱에서 볼 수 있을 거예요. 제 산책 교복이거든요.


사실 걷기 좋은 날이 어디 따로 있겠어요. 그냥 걷고 싶은 맘만 있으면 되는 거죠. 전 가끔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튼튼한 다리가 있어서요. 예전에 종아리 보톡스를 맞은 적이 있는데 진짜 신기하게 힘이 안 들어가더라고요. 오래 걷지도, 잠깐 뛰지도 못해서 한동안 애를 먹었어요. 그 이후론 절대 안 맞아요. 무다리에 울퉁불퉁 못생긴 다리면 어때요. 덕분에 오래 걸어도 지치지 않으니 전 만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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