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훌쩍 아빠와 걷기 시작했다
내 나이가 어느새 마흔을 넘었다. 결혼 11년차, 애가 둘이다.
내 아이가 크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의 흐름을 짐작하곤 한다. 그리고, 내 부모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가늠한다.
올해로 일흔둘이 된 우리 아빠는 정년퇴직 후 집에서 행복한 은퇴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동네 도서관에서 온갖 나라의 역사서적을 빌려 읽는 행복한 '역사덕후'로, 때론 가족단톡방에 필독도서를 추천하기도 한다. 등산과 테니스도 즐기는 활동적인 노년이고, 저녁 식사 후에는 엄마와 동네 산책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랑꾼이다.
내가 아빠와 더 많은 시간을 갖기 시작한 건 지난해 부터다. (함께 있을)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불현듯 깨달은 덕분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한달에 한번 아빠와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 회사엔 주말근무 대휴라는 제도가 있다. 주말 이틀간 8시간 근무를 하고 평일 하루를 쉬는 시스템이다. 이날에 나는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쓴다. 아이들은 어김없이 학교와 유치원을 가는 그 시간, 나는 나만을 위해 아침일찍 집을 나선다. 남들은 일할 때 쉬는 맛이란.
대휴 일정이 나오면 전주부터 아빠와 일정을 짠다. 걷기 유전자를 주고받은 사이인 만큼, 목적지는 보통 산이다. 서울엔 참으로 걸을 곳이 많은데, '역사덕후'인 아빠가 최근 추천한 길은 다름아닌 한양도성길이다.
한양도성길은 총 4코스로 구성돼 있는데, 1코스 백악산 구간은 창의문을 시작으로 숙정문을 거쳐 혜화문까지 이어진다. 2코스는 낙산구간으로 혜화문 부터 흥인지문, 광희문까지다. 3코스는 남산구간으로 광희문을 시작으로 숭례문까지 연결된다. 마지막 4코스 인왕산 구간은 돈의문과 사직공원 뒷길을 지나 창의문에 도착한다.
뭐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법. 가장 난코스로 예상되는 1코스 백악산 구간이 우리의 첫 목적지가 됐다. 예상 시간은 3시간. 첫 날인 만큼 엄마와 언니도 어렵싸리 함께 했다. 어쩌다 보니 작은 친정모임이 완성됐다.
만남은 3월의 어느 목요일 오전 9시. 경복궁역이다. 설레는 맘에 학교 가는 큰아이보다 먼저 집을 나선 나는 시청역에서 하차했다. 그리고 경복궁역을 향해 걸었다. 워밍업이랄까. 과거 광화문역 일대에서 근무했던 만큼 이곳 지리만큼은 누구보다 빠삭한 나다.
8시 반, 경복궁역 앞 작은 카페에서 미숫가루 라테로 속을 든든히 채웠다. 그리고 산 위에서 먹을 김밥을 네줄 샀다. 오늘은 1구간 걷기를 완료하고 종로5가 광장시장에 가는 코스다. 광장시장의 명물인 육회탕탕이, 빈대떡에 막걸리를 곁들인 후 에스프레소로 입가심을 하면 클리어.
9시보다 조금 늦은 시각, 엄마 아빠 그리고 언니가 등장했다. 평상시 테니스를 즐기고 앞산 뒷산은 뒷짐 지고도 걷는 만큼 언니와 아빠의 체력 걱정은 이미 제쳐뒀다. 문제는 엄마다. 걷기 보다는 앉아서 수다떨고, 시낭송을 즐기는 우리집 '최여사'는 오늘 모임의 목적성을 뒤늦게 깨닫고 괜히 왔다며 곡소리를 늘어놨다. 3시간 코스라는 말에 "윤동주 문학관에 두고 가라"며 우는 소리를 낸다. 윤동주 문학관은 창의문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역에서 창의문까지는 택시로 이동한다. 요즘 택시비 인상폭이 커져 손님이 줄었다는 기사 아저씨의 푸념을 들으며 창의문 앞에 다다랐다.
자, 이제 시작이다. 창의문 바로 앞에는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있다.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과 대치하다 순직한 고 최규식 서장을 기념하는 동상이다. 이후 최규식 서장은 경무관으로 특진했다. 아빠가 읊어주는 김신조 일당의 남한침투 코스를 들으며 돌고래 쉼터로 향했다.
솔직히, 1코스는 초반이 암울했다. 1년에 한번 등산도 제대로 안하는 최여사에게 1코스는 좀 과했다. 헉 소리나는 경사의 계단을 오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괜히 따라왔다며 이마의 땀을 훔치던 최여사는 등을 밀어주는 아빠의 손길에 어느새 깔깔 소녀처럼 웃음을 터뜨린다. 괜히 잉꼬부부가 아니다.
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백악산 고개를 올라가는데, 가도가도 계속 오르막이다. 안개가 자욱한 만큼 돌아온 길을 되짚어보면 고꾸라질까 무서울 정도다. 손잡이를 잡은 채 앞만 보고 한걸음씩 옮긴다. 날이 좋으면 청와대도 보인다는데 오늘은 아쉽게도 뿌연 안개에 가렸다.
1코스는 개방된지 얼마 안됐다는 아빠의 부연설명이 잇따른다. 청와대 경호와 군사시설 보호를 위해 오랜시간 통제했던 청와대 뒷길을 개방한 건 54년 만이라고. 2022년 5월 청와대 개방과 그 시기가 일치한다. 덕분에 자연 그대로의 산성길을 만끽할 수 있다.
1.21사태로 총상입은 소나무를 거쳐 청운대 너른 들판에 다다르자 이제는 제대로 쉴 타이밍이다. 트래킹 시작 1시간 시점이다. 각자 김밥을 하나씩 든 채 말 없이 밥알을 씹는다. 한시간 전에 분명 든든히 속을 채웠는데 산 위에서 먹는 김밥은 꿀맛이다.
이제는 내리막길. 최여사는 아빠와, 언니는 나와 2열로 하산한다. 최여사의 푸념은 어느새 도란도란 수다로 바뀌어있다. 숙정문을 거쳐 말바위안내소에 다다른다. 여기서 첫번째 스탬프를 찍는데 성공했다. 앞으로 흥인지문과 숭례문, 돈의문 구간에서 스탬프를 각각 찍으면 '서울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는 완성이다.
와룡공원을 향하는 길, 열혈 문학도이기도 한 최여사는 아빠와 길상사의 유래에 대한 상반된 주장을 펼친다. 사대문 안 유명 기생집 대원각은 어떻게 길상사가 된걸까. 아빠는 대원각의 주인이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절이라고 설명하고, 이에 엄마는 시인 백석을 사랑한 기생의 이야기를 더한다. 현대사 한켠에 담긴 애틋한 로맨스에 절로 귀가 쫑긋해진다.
용이 길게 누워있는 형상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와룡공원에 도착하자 나는 삼국지연의 속 와룡과 봉추를 생각한다. 와룡과 봉추,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다던 중국 고대의 지략가들을 떠올린다. 삼고초려 끝에 유비와 함께 하게 된 제갈량, 능력을 가리는 외모로 묘사된 방통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에 아빠는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던 김진명 작가의 이야기를 꺼낸다. 쉼없이 대화가 이어진 끝에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른다. 이젠 광장시장에 가서 신나게 목을 축일 일만 남았다.
다음번 한양도성 트레킹은 다음달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아빠는 한양도성은 당초 3구간으로 나뉘었다며 2, 3코스를 한번에 돌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코스는 아빠가 정하라고 하고, 난 맛집이나 찾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