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훌쩍 아빠와 걷기 시작했다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4월 5일. 기다렸다는 듯이 폭우가 쏟아졌다. 머선일이죠..
물론, 이날 비는 예보된 바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많이 오랫동안 내렸다는 게 문제.
저질체력의 소유자는 비에 젖은 생쥐가 되어 점심 밥상을 앞두고 말을 잃었다는 슬픈 이야기.
야심차게 시작한 한양도성 정복. 서울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걸어봐야 한다며 나 스스로를 독려하며 시작했다.
지난달 1코스에 이어 이번달엔 2코스. 올해로 일흔한 살인 아빠는 2, 3코스 정도는 하루에 다 걸을 수 있다며 마흔 살 딸을 응원했다. (근데 아빠 미안, 내가 못하겠어)
그런데 이게 머선일. 약속한 4월5일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비가 조금 오면 모자만 쓰고, 비가 많이 오면 우산을 쓰고 걷자며 집을 나섰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이날 모자를 쓰지 못했다. 당연히 우산을 접지도 못했다. (어짜피 접지도 못할 우산인데, 기왕이면 큰 걸 가져올 걸 그랬다는 후회를 했다)
들이치는 비에 후드티는 쫄딱 젖었고, 방수 안되는 패션 백팩은 흠뻑 젖었다. 빗길을 첨벙첨벙 걷다보니 운동화는 물론 두툼한 등산양말까지 물에 빠진듯 축축해졌다. 냄새는 둘째치고 몸이 너무 무겁다. 犬피곤.
시작은 늘 그렇듯이 좋았다.
오전 10시30분, 안국역 2번 출구서 마을버스 2번 승차. 종점인 '성균관 대학교 후문, 와룡공원' 역에서 하차.
(와룡공원-혜화문은 약 2km 정도되는 거리로, 1코스에 해당된다. 지난번 함께 걸었던 엄마의 간청으로 와룡공원에서 과감히 하산을 결정한 바 있다.)
비 내리는 와룡공원은 고즈넉함 그 자체로, 이날의 기후 탓인지 유난히 사람도 없어 한산했다. 어제까지 풍성했을 벚꽃잎은 빗물에 휩쓸려 길바닥에 들러붙었다. 고인 빗물에 가득 담긴 벚꽃잎을 보며 '이번 주말 본격적으로 시작될 각 지자체들의 벚꽃행사는 어쩌나' 걱정을 했다. "벚꽃 없는 벚꽃행사는 앙꼬없는 찐빵, 붕어 없는 붕어빵"이라고 아재개그를 나누며 낄낄댔다. (그때 내 걱정이나 했어야 했는데. 어리석었다)
와룡공원에서 혜화문까지는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지난 1코스 초반이 등산이었다면 1코스 후반은 산책로에 가깝다. 이 순간 "다시는 안온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던 엄마를 떠올렸다. 이 길을 함께 걸었다면 분명 좋아했을텐데. 아닌가, 비오는 날이라면 더 싫어했을라나. (스타일 구기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최여사는 머리 가라앉는 비오는 날을 싫어한다)
혜화문으로 가는 길, 일부구간은 성곽이 유실되어 눈길을 끌었다. 어떤 건물은 성돌의 일부를 담벼락으로 활용한 경우도 있었다. 혜화동 골목에 진입해 경신고등학교를 지났다. 이곳은 축구의 명가. 차범근의 모교다. 푸르디 푸른 인조잔디 축구장이 너르게 펼쳐져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비바람을 헤치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혜화문.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는데, 혜화문은 4소문 중 하나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문화재관리인 아저씨는 "고즈넉하게 걷기 좋은 날"이라며 "부녀가 보기 좋다"고 덕담을 늘어놓는다. 아저씨와 즐거운 담소도 잠시, 다시 빗길 트레킹을 강행한다.
이제 본격 2코스에 돌입한다. 2코스는 혜화문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 총 2.3km의 거리다. 성인어른 1시간10분이면 거뜬히 걸을 수 있는 비교적 순한맛 코스다. 물론 비가 안오는 날에 한해서다. 이 날은 비도 쏟아지고 바람도 거센 날이었다. 날도 참, 하필 잘도 잡았다.
이후 동대문까지 가는 길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쏟아지던 빗소리만 선연하게 기억이 남는다. 그저 손은 우산을 받쳐들고, 발은 기계적으로 걸었던 것 같다. 이제는 의미고 뭐고, 동대문을 향해 걷는다는 목표만 남은 상황. 어느새 우리 부녀는 말을 잃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선택한 점심메뉴는 닭볶음탕.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닭볶음탕을 앞에 두고 나는 아빠에게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길에 대해 물었다. 무념무상. 왜 갑툭튀 그런 질문이 나온건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여튼 당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튼 언 몸을 녹이는 소주 한잔에 닭다리를 뜯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추위에 몸을 떨었다. (왜 그날 나는 에어컨 바로 앞에 앉은 것인가)
그리고 이틀 후, 나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어쩐지 그날 어지간히 추웠더랬다.
두번째 걸린 코로나는 처음 보다 더 아팠다. 오한과 몸살로 기미를 보이더니 콧물과 기침이 동반습격했다. 주말을 꼬박 침대와 한몸이 되어 앓아 누웠던 나는 결국 일주일 격리체제에 돌입했다.
나에게 한양도성 2코스는 2번째 코로나와 한몸이다. 제발 3코스 걷는 날은 비 오지 말아주라.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