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즐겁지 않은 13만 명에게
어제는 연휴 전의 금요일인 줄 인식도 못한 채 기분전환이나 할 겸 카페로 나섰다. 아기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부터 혼자 공부하는 학생까지, 언제나 비슷한 사람들이 오가는 그곳이 묘하게 들떠 있고 어수선했다.
혼자 책을 보고 있는데 바로 옆자리에 대학생인 듯한 두 학생이 앉아 수다를 떨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뜻하지 않게 한 학생의 가정사부터 진로고민까지 들어버렸다. 두 학생이 카페를 떠나자마자 바로 앞 테이블에 직장인 두 명이 와서 자리를 잡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또 뜻하지 않게 그들의 직업과 이성관을 들어버렸다. 설 연휴를 맞아 고향에 내려와 오랜만에 만난 초중고 동창이라는 tmi까지 알아버렸다.
모르는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들은 게 괜시리 찔려서 일부러 그들의 얼굴만큼은 절대 보지 않았다. 자리가 비좁은 카페에 가면 늘상 있는 일이다. 평범하고 활기찬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나같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간. 단돈 5천원으로 살 수 있는, 활기와 고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공간. 가끔은 집보다 카페에서 더 안정감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친구랑 카페에 앉아서 시시콜콜 수다를 떨던 게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난다. 아무래도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야말로 천직인 것 같다. 자소서에 쓰지는 못하지만 나의 장점과 특기는 ‘외로움 잘 견디기’이다. 이것만큼 쉬운 게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슬프면 슬픈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그저 나를 가만히 냅두면 된다.
물론 약간의 훈련도 필요하다. 타인은 영원히 지옥이며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마인드 훈련을 매일매일 해주면 외로움을 견딜 근육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외로움 하나도 못 이기는 한심한 사람이라 매도하는 공격력도 생긴다. 넓고 얕은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 쉴 새 없이 연애하는 사람, 결혼을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이를 안 낳으면 노후에 외롭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 그들 모두가 사이비를 신봉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의 기준에선 나야말로 사이비겠지만, 어차피 저마다의 세계관이 있는 법이다.
혼자인 게 외롭다고 느껴지지도 않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혼자 밥 먹고 혼자 쇼핑하고 혼자 영화보는 사람이 된다. 혼자서 시간을 더 알차게 쓰려고 고민하게 되고,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겨도 피하게 되고, 남들이 나를 친구 하나 없는 한심한 사람으로 생각해도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 은둔형 외톨이라고도 하고 사회 부적응자라고도 하고 아싸라고도 하고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내가 쟤보단 낫지”에서 ‘쟤’를 담당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은둔형 외톨이가 서울에만 13만 명이나 있다고 한다. 무려 나같은 사람 13만 명이 13만 개의 방구석에서 안 나오고 있다는 말이다. 나라의 미래가 심히 걱정된다. 하지만 지구 한구석에서 기아나 전쟁이 판쳐도 나는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듯이, 13만 명 분의 우울과 절망이 한반도 한구석에서 판을 쳐도 나머지 5천만 명은 행복하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외로운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니 외로운 사람도 굳이 세상을 갈구하지 않게 된다. 당연한 이치다. 나머지 5천만 명이 다 행복한 건 아니라고 하겠지만, 힘들어도 정신줄 부여잡고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강한 사람이다.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절대 이해 못한다.
4시간 동안 남 이야기 엿듣기와 책 읽기를 반복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집에 들어왔다. 혼자서도 할 일이 너무 많다. 밥 차려 먹기, 티비 보기, 설거지하기, 공부하기, 책 읽기, 일기 쓰기, 내일 계획 짜기... 이 평화롭고 고요한 하루가 감사하다가도, 불쑥 찾아오는 불안과 우울 때문에 살아갈 동력을 잃기도 하면서 비틀비틀 살아 가고 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같은 설 연휴라도 누구는 가족과 친구를 만나고 누구는 해외여행을 가고 누구는 일을 하고 누구는 은둔을 하겠지. 설, 크리스마스, 연말연시, 생일, 무슨무슨데이. 나만 혼자라는 사실이 극대화되는 날들이다. 들뜨고 설레야 마땅한 그 날들이 여전히 너무 싫다. 그렇다고 집에서 부정적인 생각만 곱씹을 수는 없다. 어제는 카페를 갔고 오늘부터는 노동으로 근심을 날리기로 했다.
13만 명. 불쑥 덮쳐 온 외로움에 겁먹고 울고 있는 사람도, 덤덤하게 외로움을 다룰 줄 알게 된 사람도, 앞날이 막막해서 주저앉아 버린 사람도, 소중한 것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도, 내가 상상도 못하는 슬픔을 안고 있는 사람도, 모두 저마다의 근심 날리기 노하우를 찾아내길 바라며, 각자의 방식으로 모두가 잘 살아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