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서울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을 읽고

by 가문비

부천 원미동. 서울에 살기엔 여력이 안되며, 그렇다고 아주 시골로 내려갈 용기는 없는 사람들의 터전. 아류들의 구질구질하고 권태로운 삶으로 가득한 곳. 가부장제와 노란장판의 침침한 분위기 때문에 책을 읽다가도 멈칫멈칫 하게 되지만, 아무래도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여기 나오는 모든 인간 군상들이 다 내 안에 있는 듯하다.


서울생활을 포기하고, 원미동보다도 훨씬 먼 나의 고향으로 내려온 지 1년이 넘었다. 어찌저찌 자리는 잡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 다행을 매일매일 더 정교하게 합리화하는 중이다. 애초에 서울 태생이 아니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며 말이다. 야망도 없고 운명의 상대를 기다리지도 않는 내가 굳이 서울 한구석의 비좁은 단칸방에 월세와 생활비를 쏟아넣을 필요는 눈곱만큼도 없다. 하지만 막상 서울 생활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는 내 인생이 대보 후퇴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쏟아부은 매몰비용은 그렇다 쳐도,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도 한계가 생겨버렸으니 말이다.


소소한 아파트 대출금을 갚아가며 소소하게 차도 몰아보고, 퇴근하면 영화 한편, 주말에는 구립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고, 연휴에는 근교에 여행도 나가보는, 지방에서의 유유자적한 삶. 이렇게 살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도 철이 덜 들었는지 이 모든 걸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 원망도 해보고, 몇 번 좌절했다고 무기력해져버린 내 성격 탓도 해봤지만 변하는 건 없다.


날 때부터 서울에 번듯한 집 한 채 가지고 태어난 친구들이 아직도 꽤나 자주 생각난다. 서울 공화국이나 지방소멸 같은 단어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울적해진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도 처음으로 든 생각은, 서울에만 사람이 몰리니 저런 말도 안되는 일이 생기지, 였다. 그래도 내 자격지심은 세상이 돌아가는 그런 순리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젊은이들은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동경한다. 나처럼 포기해버린 사람들도 서울에 대한 미련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말하자면 서울 드림이다. 서울에서 다니는 대학, 서울에서 갖는 직장, 서울에서 사귀는 친구들, 서울에서 만나는 예비 신랑신부. 모두 가져야만 ‘성공’이다. 서울이 아니면 내가 발전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 자체가 차단되는 게 현실이다. 나도 20살 갓 상경할 때에는 언젠간 광화문이나 여의도의 고층 빌딩 사이로 출퇴근하며 그곳에서 뿌리내리겠다 다짐하며 청약까지 넣어뒀더랬다. 지금은 해지한 청약금으로 예쁘고 쓸데없는 잡동사니들을 사들여 집을 꾸미고 있다. 일단은 서울에서 지출하는 비용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직장을 찾기가 어려웠고, 그 다음엔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박살났고, 이윽고 집에 내려오고부터는 바쁜 친구들이 굳이 시간 내서 나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심술이 나서 모든 연락을 끊어버렸다. “서울 언제 와?”가 그들의 안부였다. 마치 한국인이라면 서울에 있어야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여유롭고 당당한 태도였다. 이때 끊어버리지 않았더라도, 언젠간 끊겼을 관계였으리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 일련의 패배와 자격지심 사이를 무기력과 우울이 관통하고 있었고, 나는 여러모로 빈털털이가 되어버렸다. 서울을 포기한 대가는 그런 거였다. 서울은 젊음과 성공 그 자체다. 멋진 직장과 고급 문화생활은 물론 타인에게 과시할 수 있는 대부분의 문물은 다 서울에 있다. 서울에 산다는 것만으로 지방에 사는 사람들보다 반절은 앞서나가는 것처럼 보이니 삶을 대강 체념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서울을 떠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건강한 사람들도 있다는 걸 잘 안다. 세상은 서울보다 넓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팍팍한 살림에도 서울을 절대 떠나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가끔은 정말로 궁금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뭐 때문에? 약간의 오락과 약간의 허영과 약간의 야망을 버리기만 하면 꽤나 쾌적한 삶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이 너무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 그들의 노력과 능력에 걸맞는 보상을 제대로 못해주는 나라 탓도 클 거다. 아무리 생각해봤자 결국은 내가 젊은 사람치고 이상하리만치 무기력하다 것과, 애초에 가진 것 없이 태어났다는 데에서 오는 소외감밖에 안 들지만 말이다. 하긴 이건 우리가 스스로 어찌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미 너무 깊고 넓은 강을 돌이켜버린 대한민국이다. 오죽하면 40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이 지금도 전혀 위화감 없이 와닿을까.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무섭도록 화려해진 한국이지만, 왜 40년 전부터 제기된 문제의식이 지금은 더 악화되기만 했을까. 40년 전의 사람들도 지금의 사람들도, 하루하루 알차고 즐겁게, 좋은 생각만 하며 좋게 좋게 사는 게 참 어렵다.


그래도 이 책의 이야기들이 전하고자 하는 건 그런 염세주의라기보다는, 이런 저런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그냥 그렇게 언제까지나 살고 있다는 것, 그뿐이겠지. 돈 때문에 추운 공기 속을 전전하다가, 때로는 타인을 의심도 해보고, 상처도 줘보고, 경쟁도 해보고, 비교하며 안도감을 가져보며, 언젠가는 절망하여 산속에서 외롭게 흐느끼거나, 누군가를 향한 사랑인듯 연민인듯 쓰라린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살아가거나, 자신의 안정적인 토대가 되어준 가족들의 희생을 뒤늦게 알아채거나 하면서. 고생길을 걸어 도착한 산봉우리 너머에 또다시 내리막길이 주어지더라도 그저 묵묵히 내려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삶, 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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