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증 1

by 산책온


폭식증은 정말 소리 없이 왔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도 아니고, 분명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였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가 보다, 요즘 일이 많아서 그렇겠지, 잠을 못 자서 그런 거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는 늘 감정을 비교적 잘 다루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화를 크게 내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고, 적당히 웃으며 넘길 줄 안다고 믿었다.


그런데 버틴다는 건, 어쩌면 처리하는 게 아니라 미루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는 걸 나도 안다. 분명 방금 식사를 했는데도 냉장고 문을 다시 열고, 배가 부른데도 계속 입에 무언가를 넣는다. 먹는 동안에는 잠깐 조용해진다. 머릿속이, 가슴이, 불안이. 그런데 먹고 나면 더 큰 자책이 밀려온다. 체중은 80킬로에 가까워졌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은 나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한다. 그 어색한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나는 사람 소리가 나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 TV를 켜두거나, 의미 없는 영상을 틀어놓는다. 누군가 떠드는 소리, 웃는 소리, 대화하는 소리가 배경처럼 흐르고 있어야 겨우 눈을 감는다. 조용해지면 불안이 커진다. 침묵 속에서는 내가 외면해 온 것들이 또렷해진다. 카드값, 늘어난 몸무게, 미뤄둔 일들, 성당에 가지 못한 시간들. 고요는 나를 마주 보게 만들고, 나는 아직 그게 두렵다.


나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떠올렸다. 망망대해 위 작은 구명보트, 그리고 그 위에 함께 탄 호랑이. 나는 그 호랑이가 스트레스라고 생각했다. 이 작은 배에서 어차피 같이 가야 할 존재. 무섭다고 바다에 밀어 넣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할 수도 없는 존재. 도망칠 수도 없으니 결국 함께 있어야 하는 존재.


나는 그동안 그 호랑이를 피해 배 구석으로 숨은 것 같다. 음식으로, 영상으로, 미루기로. 그러나 호랑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에서 호랑이가 사라질 때 주인공은 울었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존재였는데, 막상 떠나버리니 허무해진다. 어쩌면 스트레스와 불안은 나를 괴롭히는 동시에, 내가 버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건 아닐까.


지금 나는 바닥에 있다. 몸도 마음도 무겁다. 성당 문턱을 넘는 일도, 카드 명세서를 펼치는 일도, 체중계에 올라서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의미 없는 영상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며, 그저 불안을 잠재우는 데만 집중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한다.


그래도 조금씩 바꿔보려고 한다.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하나씩. 배가 고프지 않은데 손이 갈 때 “지금 내가 배고픈 게 아니라 불안한 거구나” 하고 한 번만 생각해 보기. 영상 대신 누군가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내보기. 카드값을 다 보지 못하겠으면 첫 줄만 보기. 성당에 가지 못하겠으면 집에서 잠깐 눈을 감고 숨을 고르기.


폭식증은 소리 없이 왔다. 그렇다면 회복도 큰 결심이 아니라 작은 행동으로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아직 바다 위에 있다. 배는 작고 파도는 높지만,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도망치는 대신 호랑이를 조금씩 길들이는 법을 배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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