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의 진실이 선물하는 영화같은 삶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에드워드 양

by 채수빈

<하나 그리고 둘>은 대만의 중산층 가족의 결혼식으로 시작한다. 전 여자친구가 다짜고짜 찾아와 "그 여자가 아니라 내가 당신과 결혼했어야 했다"라며 난동을 피우는 극적인 사건이 생긴다. 그런데 곧바로 할머니가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건으로 전환된다. 할머니의 혼수상태는 가족의 일상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을 것 같지만, 가족은 결국 각자의 일상을 영위하는 수밖에 없다. 강렬한 하나의 사건에 집중해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다가 마는 것이 <하나 그리고 둘>의 긴장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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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타임이 세 시간에 달함에도 이 영화가 길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영화 속 시간이 현실의 시간처럼 흐르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건만을 강조하지 않고, 걷고 기다리고 바라보는 순간들까지 고스란히 담아낸다. 결혼과 죽음, 기억과 후회, 첫사랑과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작은 시도들 중 하나만 떼어 놓아도 충분히 극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영화는 그것들을 나란히 놓은 채 삶의 결을 그대로 보여준다.


중년의 아버지 NJ는 일본인 클라이언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쓰는 동시에, 과거의 연인과 재회한다. 10대 딸인 팅팅은 첫 연애를 마주하고, 여덟 살 아들 양양은 학교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이 모든 사건은 당시 서구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도시 대만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하나 그리고 둘>이 속한 대만 뉴웨이브 시네마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데, 이 시기 대만 사회에서는 가치관의 급격한 변동이 일어났다. 영화는 인물들이 겪는 혼란을 통해 그 본질을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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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며 관객은 평범함이 엄청난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기 때문이다. NJ는 자신의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아무 설명 없이 떠났던 옛 연인을 만나며 삶의 후회들을 확인한다. 그의 첫사랑은 비참한 현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과거를 미화한다.


아이들인 팅팅과 양양도 마찬가지다. 팅팅은 자신이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지 않아 할머니가 쓰러지지는 않았을지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다 이웃 동갑내기 친구, 그녀의 남자친구와 삼각관계에 휘말린다. 가장 어린 양양은 어른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며 수영을 하게 되고, 지금까지 당했던 괴롭힘은 곧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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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든 혼란 속에서 가족은 의사의 말에 따라, 혼수상태의 할머니를 찾아가 이야기를 건넨다. 각자 삶 속에서 느낀 공허함을 몇 마디로 풀어내고, 다시 이를 채우려는 시도를 한다. 어린 양양에게 그것은 사람들의 뒤통수를 사진으로 찍으며,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영화에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영화의 핵심 주제를 잡고 있는 것은 어머니 민민이다. 그녀는 아들에게는 할머니에게 계속 말을 건네달라고 하지만, 막상 본인이 말을 시작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을 느낀다. 자신의 어머니를 깨울 만큼 그 말들이 멋지지 않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는 무너지는 마음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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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할 말이 없어. 매일 똑같은 얘기만 해. 아침에 뭐 했고, 오후에 뭐 했고, 저녁에 뭐 했는지... 1분이면 끝나. 견딜 수가 없어. 내 삶엔 너무나 아무것도 없어.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수 있지? 난 텅 빈 삶을 살고 있어, 매일매일... 늘 똑같은 일만 해. 나는 매일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잠시 불교 수련원으로 현실도피를 하나, 그곳에서도 단조로움이 존재함을 깨달으며 돌아온다. 영화는 민민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막내아들 양양을 통해 해주고픈 말을 전달한다. 양양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모르는 걸 말해주고, 볼 수 없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라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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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창 시절 미국 하이틴 영화를 많이 봤는데, 대개 영화는 졸업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주인공의 연설과 활기로 가득했다. 그래서 막상 나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식은 참 쓸쓸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많은 영화들은 결혼식이나 첫 키스, 졸업 같은 사건을 화려한 연출과 음악으로 그린다. 그래서 실제 삶에서 그런 순간을 맞이할 때도, 우리 역시 그런 드라마틱함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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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평범한 이유는 그 순환성에 있다. 그 순환을 대만의 한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다. 가족의 순간들을 관찰하기 위해 감독 에드워드 양은 결혼식과 장례식 사이의 시간을 택한다. 각 인물은 인간 삶의 서로 다른 단계를 대표한다. 지엔 가족의 이야기들은 반복되는 이미지들로 서로 묶이며, 인물들은 도시에서 향수와 후회를 반복한다.


가족들은 모두 예상치 못한 만남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특히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3시간 후 영화는 사실상 시작한 지점에서 끝난다. 결혼식과 장례식, 살인과 출산, 해외여행처럼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이 연이어 등장하지만, 지엔 가족의 외적인 상황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미미한 외적 변화와는 다르게 인물들의 내면은 분명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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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가족영화처럼 따스하게 느껴진 순간들이 인상적이다. 물론 어린 아들이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 속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꽤나 다정하다. 결혼식장에서 음식을 거부하는 아들을 데리고 나가 함께 밥을 먹는 장면, 그리고 아들에게 카메라를 사주는 장면이 있다. 아들은 사람들의 뒤통수만 사진으로 찍는데, 아버지는 이를 꾸짖기보다 이해하려 한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했던 관계를 아들에게는 주고 싶다고 말이다. 나중에 양양은 어른이 되면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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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리고 둘>은 삶에 있어 낭만적인 결단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연말에 기쁨과 허무함이 동시에 드는 사람들에게 <하나 그리고 둘>의 대사 하나를 들려주고 싶다.


“삶에서 매일은 처음이에요. 매일 아침은 새롭죠. 우리는 결코 같은 하루를 두 번 살지 않아요.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죠.”

"Every day in life is a first time. Every morning is new. We never live the same day twice. We're never afraid of getting up every morning."



*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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