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기라는 삶의 기술, 제인 오스틴을 처방해드립니다

제인 오스틴을 통해 배운 삶의 재독법

by 채수빈

"이미 읽었던 책 아니야?"

어릴 적 엄마한테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자라면서도 친구들, 선생님들에게서도 계속 들었던 말이기도 하고. 오히려 나는 같은 이야기를 다시 읽지 않는 사람들이 더 신기했다. 처음 읽었을 때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놓쳤던 것들을 볼 수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기에 읽는 경험 자체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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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로 다시 읽었던 책들은 두 가지 유형이었다. 하나는 <해리 포터>, <끝없는 이야기>, <나니아 연대기>, <시간의 주름>과 같은 판타지 소설들. 그리고 하나는 <작은 아씨들>, <빨간 머리 앤>, <제인 에어>처럼 여자 주인공이 활약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나와 전혀 다른 시공간에 사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읽으면 자꾸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나는 이야기들을 나침반 삼아 불안을 해소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갔다. 그래서 <제인 오스틴을 처방해 드립니다>라는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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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을 처방해 드립니다>는 루스 윌슨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을 다시 읽은 과정을 담고 있다. 일흔을 넘긴 시점, 저자는 학문적 성취와 개인적 안정 속에서도 설명하기 힘든 깊은 공허함을 자각한다. 그녀는 과감한 선택을 하는데, 바로 호주 남부 하이랜드 지역의 노란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10년간 남편과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제인 오스틴의 모든 소설들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10년간 문학 세계를 탐구하며 88세에 박사 논문을 완성, 아흔이 되어 이 회고록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은 오스틴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한 인간이 삶을 다시 설계해 나감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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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제인 오스틴이었을까? 소설이 다시 읽을 가치가 있으려면, 개인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새로운 통찰을 제공할 잠재력이 있어야 한다. 저자는 제인 오스틴의 잠재력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다. 작품들을 통해 자신이 삶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걸려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되묻게 할 만큼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는 충분한 복합성과 깊이가 있음을 증명해낸다.


책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 해설보다는 작가의 인생에 대한 내용이 더 많다. 목차는 작품별로 나뉘지만, 소설의 해석과 개인사가 뒤섞이며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별 회고를 읽으며, 작가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은 <오만과 편견>이라고 느꼈다. 적어도, 그녀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이라고 느꼈다.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대화를 무기로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던 순응적 역할을 유쾌하게 전복하는 제인 오스틴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오스틴의 경쾌한 문장들을 읽다 보면 그녀가 당대의 연애 프로그램 패널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시원하게 우리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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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했던 오스틴의 작품은 <이성과 감성>이다. 두 자매가 대조되는 재미가 있는 <이성과 감성>은, 감정을 직시하지 않는 회피형과 지나치게 애정을 갈구하는 불안형이 겪는 성장통의 이야기이다. 반면 저자는, 나로서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대시우드 가족의 이주 경험에 주목했다. 자신의 가족이 이스라엘로 옮겨가야 했던 기억을 소환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저자가 전반적으로 추구했던 것이 다름 아닌 '자발성'이라고 느꼈다. 당시 여성들에게 허락된 선택의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제인 오스틴은 여성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았고, 그들의 연애와 경제적 선택을 진지하게 다뤘다. 한때 사소하다고 여겨졌던 문제들에 무게를 부여한 것이다. 여성이 누구와 결혼하는지가 왜 중요한가. 당연히 그 여성에게는 중요하다. 그 선택의 결과는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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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저자는 오두막에서의 고독한 시간을 지나 다시 시드니로 돌아와, 남편과 LAT(Living Apart Together) 관계를 선택한다. 우정을 기반으로 한 이 관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잘 맞는 방식이었다. 제인 오스틴이 좋아했을 법한 결말이다.


다시 읽기의 기쁨은,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데 있다. 저자는 다시 읽기를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의식화한다. 이는 독서 이론가 루이스 로젠블랫이 말한 ‘나선형 읽기’이기도 하다. 독자가 텍스트에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텍스트로 돌아오며 점점 더 깊은 몰입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읽기는 직선이 아니라 순환이며, 우리는 매번 같은 장면을 통과하지만 다른 높이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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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을 처방해 드립니다>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하나씩 다시 읽으며 삶을 회복해 나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독서가 줄 수 있는 자기 수용과 자기 사랑을 삶으로 증명해낸 기록이다. 책 말미에 실린, 삶의 증상에 따라 제인 오스틴의 소설 한 편을 처방해 주는 ‘제인 오스틴 독서 요법’이 인상적인데, 내가 스스로에게 내려왔던 이야기 처방전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는 섹션이다. 이 책을 덮으며 지금의 내가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다시금 질문해본다.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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