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욕망에서 벗어나는 법
혹시, 당당하게 구매해 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게 있는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사놓고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영어 문제집, 새로운 취미를 위해 한꺼번에 구매해놓고 몇 코 뜨다 만 털실, 당근마켓에 그대로 내놓으면 좋을 미술용품들... 아, 작심삼일의 대표주자 헬스장을 빼면 또 섭섭하다.
아, 그런데 나한테는 헬스장보다 더한 놈이 있었다.
그 동안 말하기 부끄러웠던 비밀이었는데, 드디어 오늘은 말할 수 있다.
그 놈을 드디어 차단한 날이기 때문에.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
구독만 하면 내가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것처럼 유혹했던 놈.
구독하는 게 많은 요즘 내가 어떤 걸 구독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태반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결제 내역을 돌아보다가 정체불명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제서야 무료 체험이 끝나고 계속 자동 갱신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내가 어도비를 구독한 역사는 2022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디자인 툴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게 명함 디자인을 맡겼다. 내가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다룰 줄 아는 것도 아니었는데, 참 회사는 당당했다. 그들은 나의 최고 장점인 '책임감'을 믿고 뽑은 게 분명하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어도비 30일 무료 체험을 했다.
그리고 '깜빡'한 사이 구독의 노예가 되었다.
처음에 결제 내역이 찍혔을 때는, '이게 뭐지?' 싶었다. 그리고 어도비였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멈칫하다가, 나를 합리화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결제된 거, 포토샵이랑 일러스트레이터 제대로 배워놓자!'
놉. 1도 배우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력이 똑같은 상태에서 해지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결제해온 내역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원데이클래스를 수강하고, 실제로 영상 편집을 몇 번 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때 뿐. 그 다음 달도, 다음 달도 마찬가지. 영상 편집 외에 다른 기능을 배우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또 나에게 속삭였다. '이번 달부터는 진짜 제대로 배워야지! 그러면 지금까지 결제한 것도 가치있는 거야. 그냥 비싼 학원 다닌 거지 뭐.'
매 달, 'NHN KCP'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옆에 적힌 금액, '61,600원'.
그리고 며칠 후, 또 결제가 된다.
'NHN KCP' - '39,600원'.
(전자는 크리에이티브 플랜, 후자는 어도비 스톡이다.)
나는 매달 101,200원을 자진해서 삥뜯겼다.
정말 구독 취소를, 지독히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포토샵도, 일러스트레이터도, 인디자인도 못하는 걸.
이렇게 구독취소를 해버린다면 너무나 쪽팔릴 것 같았다.
주식 투자 같은 것이다. 이대로는 원금도 회수 못해, 같은 생각.
내가 정신을 차린 계기는 바로 며칠 전이다.
택시보다 버스를 선택한 날이었다. 출근하자마자 급격하게 피로하고 지쳤던 날,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반차를 급하게 쓰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싶은 마음에 카카오택시 앱을 켰다. 예상 금액은 3만원.
그 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이거였다.
'3만원이면 뮤지컬 R석 5% 할인 금액인데... 이거 모아서 뮤지컬 한 편 봐도 되겠다. 참고 버스 타자.'
겨우 버스를 타고 숨을 돌리는데, 순간, 내가 요즘 매일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테이크아웃 커피 대신 회사에 있는 커피믹스 마셔야겠다. 커피값 아껴서 뮤지컬 한 편 볼 수 있겠는데.'
'옷 사고 싶다. 근데 요즘 옷 비싸던데. 이걸 아껴서 뮤지컬 보고 말지.'
'NHN KCP'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돈을 빼앗겨버리는 나는, 뮤지컬을 떠올릴 때마다 한 푼 한 푼 아끼고 있었다. 어도비를 해지한 오늘, 그 동안 내가 얼마를 어도비에 바치고 있었는지 생각하면 몇 편의 뮤지컬을 볼 수 있었을지 계산하기도 싫다.
누군가의 소비와 구독은 그 사람의 욕망을 보여준다.
나를 헛된 욕망에서 끄집어내준 것은, 더 큰 욕망이었다.
나는 어도비를 구독하며 '디자인을 완벽하게 하는 일잘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련된 파일을 정교하게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내 주변에서는 은근히 이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디자인은 내게 경쟁력 있는 기술로 보였다. 무언가를 쉽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하지만 어도비는 나를 여러모로 힘들게 했다.
10만원어치 디자인을 해내지도 못했고, 애초에 컴퓨터 사양이 어도비 앱의 엄청난 용량을 감당하지도 못했으며, 처음 보는 기능들을 배울 시간도 없었다.
나를 파먹는 욕망은 헛된 욕망이다.
나는 이제 회사가 결제해주는 캔바를 매일 쓴다. 캔바로 모두가 마음에 들어하는 사내 달력을 제작했고, 명함을 제작했다. (캔바, 너무 좋다.)
반면 뮤지컬은, 재미있게도, 나를 경제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뮤지컬 보느라 자꾸 텅장이 된다"고 농담하지만, 티켓이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이지, 실제 내 통장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왜냐, 마이너스만큼이나 플러스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이걸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야겠다는 결심 덕분에, 일을 더 늘렸기 때문이다. 몸이 가끔 지치긴 해도, 행복하다.
나에게 환상만 주던 '나쁜 연인'을 오늘 차단했다.
나는 진짜 연인에게 매일 매일 사랑한다고 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한다.
참고로, 어도비는 해지할 때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청구한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위약금 없이 해지할 수 있는 법을 블로그에 정리해주신 분이 계셨다.
(블로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혹시 저처럼 어도비의 노예이셨던 분들은,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