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위대함에 대한 갈망이 내 능력을 초과할 때 생기는 비극

연극 <아마데우스>

by 채수빈

언제부턴가 '긁힌다'는 표현이 많이 보인다.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의해 기분이 상하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어 선정에 박수를 보낸다. 쿨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이미 따끈따끈하게 스크래치가 나 버린 마음을 참 잘 비유한 단어 같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긁혀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있더라도, 그런 사람은 별로 정이 안 갈 것 같다. 상처나 자국 하나 없이 매끈하고 평탄한 인생? 모든 것에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는 불쌍한 사람 아닐까. 다른 이의 사소한 말과 성공이 내 마음에 영향을 준다는 건 그만큼 내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연극 아마데우스 포스터.jpg

소위 ’긁힌다’는 감정이, 이미 <아마데우스>라는 고전으로 얘기되고 있었다. <아마데우스>의 주인공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모든 것에 민감한 인물이다. 살리에리는 음악을 제단 위에 올리는 사제처럼 살았다. 그는 노력한 만큼, 헌신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 모차르트를 보여주었다. 모차르트는 신의 언어를 통역하듯 작곡했고, 그의 손끝에서 쏟아지는 음표들은 살리에리가 평생 갈망하던 ‘완벽’을 초과했다. 그리고 살리에리는 이를 '공정하지 않다'며 울부짖는다.


나는 살면서 1인자를 질투해 본 적이 거의 없다. 1인자를 질투할 수 있는 것은 2인자만의 특권 아니겠는가. 게다가 살리에리는 부와 사회적 인정, 지위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살리에리를 보며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무대 위 모차르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작중 모차르트의 웃음소리는 다소 경박하게 묘사되는데, 이를 듣는 순간 나도 떠오르는 것들이 많았다. 아무 걱정 없이 깔깔 웃는 사람들이 미웠던 적이 있다. 나한테 너무나 진지한 것들에 대해 가볍게 떠드는 사람, 웃어넘겨버리는 사람을 볼 때 화가 났던 순간들이 있다. '왜 나만큼 노력하지 않지? 나만큼 사랑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쉽게 가질 수 있지?'

131.jpg

1막의 마지막, 살리에리의 질투는 신을 적으로 돌리기까지 이른다. 자신의 진심이 조롱당했다는 분노였다.

<아마데우스>는 음악극으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대표 음악이 극 속에서 중요하게 연주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살리에리의 질투를 이해하기 힘들다가도 모차르트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짠한 마음이 들었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아, 살리에리가 염원한 것이 저 아름다운 멜로디였구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미워할 때조차 그가 작곡한 멜로디의 완벽함에 감탄해버리곤 한다. 질투는 미움과 사랑이 가장 미묘하게 섞여 있는 감정이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증오했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 신을 이해하고자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모차르트를 통해 자신이 신을 사랑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던 셈이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사랑했던 것 같다. 살리에리의 비극은 ‘위대함에 대한 갈망이 자신의 능력을 초과할 때’ 생겨난 질투였다.

news-p.v1.20250423.05c099a9af07488fa2a41a7c88590964_P1.jpg

1막이 살리에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면, 2막은 살리에리가 몰랐을 모차르트의 이야기 같다고 느꼈다. 천재는 언제나 양면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피카소가 말했듯, “모든 아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어른이 되어서도 예술가로 남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영원히 아이로 남았고, 그 순수함이 바로 그를 천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순수함은 동시에 그를 파괴했다. 그는 자라지 못했고 세상을 감당하지 못했다. 신이 내린 천재성은 그에게 삶의 무게를 견딜 힘이 되어주지는 않았다. 모차르트가 지니고 있던 인간으로서의 결핍은 영영 치유되지 않았고, 살리에리는 그것을 이용했다.


물론 이것은 픽션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 <아마데우스>의 유명세로 인해 살리에리가 정말로 열등감에 찌들었던 사람으로 기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서로의 지지자이자 협업자였다. 심지어 모차르트의 사후,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PS25101700445.jpg

작중 살리에리는 작곡하며 행복했던 적이 있었을까? 자랑스럽거나 뿌듯한 순간 말고, 행복한 순간 말이다. '내 안의 예술(the art in you)'을 사랑해야지, '예술 안의 나(the you in the art)'를 사랑하면 파멸한다는 말이 있다. 예술은 증명되어야 할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증명의 대상으로 여길 만큼 간절했던 살리에리를, 관객은 이해할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살리에리는 단순히 천재를 질투한 게 아닌, 자신의 진심이 하찮게 느껴져 좌절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1인자를 질투할 수 있는 2인자를 질투한다. 어머니가 태교를 모차르트 음악으로 하셨다고 했는데, 만약 살리에리의 음악으로 했다면 ‘2인자’의 버둥거림, 집요함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살리에리 당신처럼 1등을 질투할 수 있으면 좋겠어.


*본 리뷰는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글쓰기 산을 오르며 만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