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이혼했다. 마침내
1. J여사는 믿어왔다.
나의 모친, J여사는 1960년대 종로 종갓집 막내아들의 장녀로 태어났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부모 아래, 여러 번 유산 끝에 간신히 태어난 맏딸의 처우는 안타깝게도 가족마다 매우 달랐다.
당시로는 꽤 드물었던, 고등교육을 받은 그녀의 모친은 맏딸이니 빨리 시집이나 보내라는 집안 어른들의 간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행히 밑의 남동생과 나이 차이가 크다는 것도 하나의 핑계가 될 수 있었다. 다만 그녀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는 없었다. 그녀의 모친은 대학에는 보내주되, 그녀가 반드시 신앙 안에 머물기를 원했고 그렇게 그녀는 신학대에 입학했다.
인생에서 현재에 비춰 과거를 되돌아보았을 때, 과연 그것이 잘된 일이었을까, 좋은 선택이었을까 되짚어보게 되는 일이 있다.
비록 J여사의 모친 즉, 나의 외조모께서는 이미 10년도 더 전에 돌아가셨지만, 만약 지금 상황에 비추어 당시 딸을 신학대에 보냈던 선택을 재평가한다면 어떤 답을 내놓으실까. 적어도 J여사 본인은 탐탁지 않았다. 당시 희망하던 전공이 다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전남편과의 지긋지긋한 인연이 시작되었으니까.
철이 들 무렵 J여사에게 전남편과 왜 결혼 했는지,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물은 적이 있다. 이미 당시에도 그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반면 J여사는 여러 방면으로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이 질문에 대한 J여사의 대답은 항상 대학 시절로 시작했다.
모두 알다시피 당시 대학가는 민주주의의 구심점과도 같았다. J여사와 그가 다닌 대학에서도 작은 반향이 일어났다. 문제가 많았던 학교 행정과 일부 교수들에 대해 학생들의 이의제기가 있었다. 점점 좁혀지는 학교 당국의 수사망과 더해지는 압박에 함께했던 이들이 속속 손을 떼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전남편만은 끝까지 남았다. 그는 한번 옳다고 믿은 것, 한다고 다짐한 바를 끝까지 관철하려는 사람이었다.
J여사는 그런 그의 올곧음이 좋았다. 그는 비록 오래 걸렸으나 후에 목회자가 되었고, 이후로도 아무도 가지 않는 힘든 길 만을 걸으며 그 올곧음을 계속해서 증명했다.
그랬던 그녀는 그와의 결혼생활을 통해 올곧음의 단면들을 볼 수 있었다. 무식함, 미련함, 똥고집, 외골수 등. 그리고 한 사람의 올곧음을 위해 희생되는 가족들 특히 자신의 삶을. 그는 30여 년 동안 집에 생활비를 준 일이 손에 꼽았고, 본인이 신경 쓰는 집안일 외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를 들면 육아라던지. 그 모든 영역은 온전히 J여사의 몫이 되었다.
나는 최근 몇 년을 제외하고 한 번도 J여사가 일을 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복수의 직업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한 힘든 삶을 견뎌내게 한 것은 안타깝게도 그녀의 신앙이었다. 그녀는 그의 그런 올곧은 목회자의 길, 그것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뒷바라지하는 자신의 길이 모두 신의 뜻이라 믿었다. 아니,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버틸 수 없었으리라.
나는 늘 둘 사이의 역할 분담이 무척 부당함과 그것이 신의 계획과는 일절 관계없음을 주장해왔다. 그는 다만 J여사가 분담하는 만큼 자신의 몫을 위탁하고 있을 뿐이며, 그녀가 그런 처지로부터 구원을 쟁취하는 것 역시 신의 뜻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J여사는 나의 이런 주장을 만류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부부만의 일도 있다고. 그렇게 나쁜 남편은 아니라고.
그녀는 믿었다. 그리고, 한순간에 배신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