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이혼했다, 마침내
2. B씨는 늘 말이 없었다.
그는 농인 부모님 아래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장애에 대한 장벽이 지금보다도 아득히 높던 시절, 그의 아버지는 고정적인 직업 없이 일자리가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그의 어머니는 남은 형제들을 챙기기보다 타지로 떠나는 아버지와 동행하기를 선택했다.
간혹 이 시절 B씨가 살던 집의 풍경을 상상해보면 살풍경이 따로 없다. 5형제가 나누는 대화라고는 생활에 필요한 필수적인 의사전달을 제외하고는 없었으리라.
어릴 적 고모로 알고 지낸 분이 계셨다. 사실은 5형제가 어린 시절 살던 집의 이웃이었다. 고모가 옆집에 분명 사람이 사는 듯한데 도대체가 사람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꺼림칙하여 들여다보았더니 좁은 집에 사람이 잔뜩이었다더라. 그 뒤로 일부러 더 자주 들여다보며 교류하게 되었단다.
농인 가정의 아이들은 후천적으로 언어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정 내에서 육성을 통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언어능력을 학습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행히도 그와 그의 형제들은 언어장애는 가지지 않았다. 아니, 지금에 와서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어쩌면 장애란 눈에 보이는 질적인 수준보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양적인 수준이 더 곤란한 것일지도. 결과적으로 B씨는 언어는 사용할 줄 알았으나, 진정한 의미의 대화에는 무척이나 서툰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을 아무리 헤집어봐도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사춘기 시절 그와는 생활문제로 다툼이 잦았는데 다툼의 패턴은 늘 유사했다. B씨는 종종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그 원인은 보통 사소했다. 욕실의 슬리퍼, 냉장고 속 물통 따위. 평소에 내가 그것들을 제대로 조치하지 않았을 때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가 몇 번이 누적되었을 때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행위의 필요성을 알지 못했고, B씨의 평소 생각도 인지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 요구에 맞춰 대응한단 말인가. 왜 그때그때 좋게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반문하면 그런 사소한 일을 뭐하러 일일이 이야기하냐는 답이 돌아왔다. 불통 그 자체였다.
안타깝게도 B씨의 소통의 부재는 이런 일상적인 문제에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B씨의 사정에 따라 가족사에서 큰 두 번의 변곡점을 거쳤다. 첫 번째는 워낙 어린 시절이라 이유를 묻거나 들을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돌아보았을 때 그 변화는 내 유년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고, 두 번째 변곡점이 찾아왔을 때 고등학생이 된 나는 적어도 이번만은 제대로 된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시킬 만한 깊이 있는 소통을 나눌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어쩌면 그날 나는 B씨와 소통하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J여사는 B씨와 달리 무척 사교적인 사람이다. 언어를 기민하게 사용할 줄 알았으며, 소소한 수다부터 마음 깊은 곳을 드러나는 대화, 때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까지 능수능란한 사람이다. 그 때문일까. B씨와 가족 간 소통의 부재로 생기는 공백들까지도 모두 J여사의 몫이 되었다.
내가 B씨와 싸운 날이면 어김없이 J여사는 잠들 무렵 나를 찾아왔다. 나를 달래는 한편 B씨 라는 인간을 설명해보려고 노력했다. 되돌아보면, 그녀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그를 자식 앞에서 변호하려는 그녀의 언어는 무척이나 빈약하고 또한 불안했다. 아내인 J여사 본인도 B씨와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데. 그저 엄마인 탓에 어떻게든 아들을 달래고 이해시켜야 하는 처지였으니.
B씨가 집안의 중대사를 혼자 결정해버렸을 때도 그 후처리는 오롯이 J여사의 몫이었다. B씨는 자신의 결정과 관련된 최소한의 조치만 하고는 손을 놓았다. J여사는 늦은 밤 나를 달래듯, 갈수록 휘청여가는 집안도 달래야만 했다.
하지만 B씨는, 그런 J여사의 고군분투를 알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상황은 안정되었으니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자식과의 부족한 소통도, 자신이 소홀히 대한 여타의 집안일도,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도 모두 J여사가 어떻게든 감당해냈으니까. J여사의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알지 못했다.
B씨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