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말법사상’에 따르면 부처의 가르침은 말씀, 실천, 깨달음으로 완성됩니다. 그 셋이 온전히 전해지는 첫 500년을 정법, 깨달음이 사라진 이후 1000년을 정법, 말씀만 남고 나머지가 모두 결손 된 이후 시대를 말법이라 합니다. 흔히 ‘말세다 말세’의 말세가 이 말법의 시대를 말합니다.
우리가 서구사회에서 사용하는 기년법인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는 덕에 비기독교인이더라도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말법사상에 따르면 예수가 태어나고 사망한 지 2천 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도 지금 ‘말세’에 달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교회의 의식, 가르침들은 과연 본래의 의미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과연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아이들을 혼내지 않아
어느 종교나 집회, 예배 등 종교활동 중에 노래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가르침을 비교적 친숙한 노랫말로 바꾸어 부르며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은 물론, 미국 흑인교회에서 시작된 가스펠(gospel)과 같이 종교의식 수준으로 역할이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러한 노래를 굉장히 잘 활용하는 축에 속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종종 그 찬송가의 내용이 실제 성경의 내용, 기독교의 본질, 예수의 가르침과는 다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 어린이 찬송가 : 예배 시간에
예배 시간에 떠드는 아이 예수님이 보시면 뭐라 하실까
기도 시간에 장난꾸러기 예수님이 보시면 뭐라 하실까
아니 아니 안돼요 예수님이 화내실 거야
우리 모두 조용히 쉿 성경 말씀 잘 들을래요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했거나 어린 자녀와 함께 교회생활을 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어린이 찬송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화를 내신다고요?
그것도 어린아이들한테?!
물론, 세간에 평화로운 성자로서의 이미지로 알려진 예수는 사실 순한 성격과는 다소 거리가 멉니다. 그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한 로마제국 군인이나 정치인, 그 아래 서로 갈라서서 싸우는 이스라엘 정치인과 종교인들에게 주로 날카로운 일침을 날리기 일쑤였지요. 심지어는 성전 안에서 제물로 쓰일 가축을 팔고 환전을 하던 상인들의 장사진을 뒤집어엎고 화를 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예수도 화낼 줄 압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한테?
예수가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는 여러 구절에서 나타납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마가복음 10:13~16 구절입니다.
당시 예수는 이미 유명인이었습니다. 어느 동네든 떴다 하면 수많은 군중이 모여 그를 둘러쌌지요. 당연히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끼어있었을 겁니다. 그중 다소 적극적이었던 아이 몇몇이 예수를 직접 가까이서 만져보겠다고 가까이 갔지만, 이내 예수의 제자들이 아이들을 저지하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그런 제자들에게 화를 내며 어린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도, 막지도 말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예수가 어린아이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은 복음서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당장 위와 유사한 내용도 마태복음 19:13~15에 등장하지요. 예수는 어린아이에 대해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다’, ‘어린아이를 잘 대하는 것은 나를 잘 대하는 것과 같고, 하나님을 잘 대하는 것과 같다’는 등, 무척이나 귀한 존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예배 시간, 기도 시간이라 한들 예수가 어린아이에게 화를 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는 있습니다. 어느 상황, 장소에서건 부모나 인솔자에게 아이들을 통솔, 통제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한 고민과 필요에 따라 위의 찬송가가 등장한 것입니다. 마치 못된 일을 저지른 아이에게 ‘저기 무서운 아저씨가 이놈 한다!’, ‘경찰서 가서 경찰 아저씨한테 혼나 볼래?’와 같은 엄포를 놓는 것과 유사합니다. 낯선 어른의 권위를 빌려 훈육의 효과성을 높이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글의 시작에 언급하였듯, 그 어떤 의도나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물며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야 합니다.
예수는 모든 인간을 사랑으로 대하고자 노력하던 인물입니다. 그중에서도 어린아이에 대한 사랑은 특별했지요. 따라서 어린아이들이 예수를 자신을 혼내는 무서운 훈육자로 인식하게 되는 일은 예수께도 무척 서운한 일일 겁니다. 그리고 그 경우 혼나는 것은 아이들이 아닌 우리 어른들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