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이혼했다, 마침내
엄마가 이혼했다, 마침내
5. J여사에게 그 도시는 감옥이었다.
이미 이렇게나 파탄이 난 두 사람이 여전히 한 지붕 아래 머무는 것은 옳지 않았다. 이대로는 J여사가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불에 재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꽤 오랜 기간 그녀에게 주거의 분리를 설득했지만, 여타의 현실적인 문제들로 그것이 실행된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거의 반년이 지난 뒤에야 J여사의 딸이 사는 지역에 그녀의 새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삿날, 나는 그녀를 데리러 본가에 갔다.
십 여 년 전 B씨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오게 된 이 도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의 대학으로 떠났고, 동생도 곧이어 기숙사 학교로 떠났다. 하지만 J여사는 떠날 수 없었다. 정작 원흉인 B씨가 공사다망하시어 바삐 돌아다니는 덕에 혼자 남은 그녀는 이 생면부지의 도시에서 또다시 생존을 위해 궐기해야 했다.
자식들도 모두 떠나고, 남편마저 있는 둥 마는 둥, 친구도, 친인척도, 아는 사람도 없는 도시에서 그녀는 여전히 떠난 가족들을 위해 노동 했다. 하지만 그 보상이 고작 이런 결말이라니. 무엇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녀에게 합당한 보상을 줄 능력이 없는 초라한 자신이었다.
떠나는 짐은 무척 단출했다. 이미 상당수 짐은 먼저 올려 보냈고, 나머지 자잘한 짐들을 차에 실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가족사진을 짐에 넣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셋이서 따로 찍자고 했지만, 어쩌면 그녀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을지도.
B씨를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무척 고민했다. 화를 내고 욕을 쏟아낼까.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할까. 결론적으로 나까지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참기로 했다. 스스로가 그 분노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B씨와의 이후 관계는 고려하지 않았다. 다행히 B씨는 지독할 만큼 회피형 인간이었기에 떠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얼굴 마주할 일도 없었다.
올라오는 고속도로에서 낙동강 강변에 우뚝 솟은 절벽을 지나쳤다. 그 모습이 마치 성벽과도 같았다. 그동안 그녀를 가둬 놓았던 성벽. 과연 이 뒤에서 그녀는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또한 그 자유는 행복과 동반될 수 있을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적어도 나는 그 순간 만큼은 그녀가 홀가분해질 날이 머지않았다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개입하며 나 역시 많이 지쳤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나의 이기적인 희망사항이었다.
J여사의 영혼은 아직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