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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보 Jan 23. 2023

10. 하나님, 나를 조금 덜 사랑해주세요

엄마가 이혼했다, 마침내.

엄마가 이혼했다, 마침내.

10. 하나님, 나를 조금 덜 사랑해주세요.



우리 가족의 살림살이는 b씨의 사정에 의해 몇 번이고 그 모습을 휙휙 바꿔댔지만, 결코 b씨가 이 일에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가지는 일은 없었다. 그 어떤 정성이나 노력도 느낄 수 없었다.


피해의식에 의한 과도한 해석이 아니냐 의심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하지만 수년, 수회에 걸친 대화를 통해 그가 무려 당시의 의사결정이 충분히 민주적이었으며 모든 가족구성원에게 만족스러웠다고 여기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거듭 생각하지만 그는 분명 지능과 도덕성 둘 중 하나는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사태의 주범이 부재하니 남은 피해자들은 날 선 감정들로 불필요하게 서로를 할퀴었다. 서러움, 후회, 짜증, 분노. 갖은 흉한 것들로 서로를 헐뜯고 나면 그 상처를 보듬어 줄 이도 또다시 서로밖에는 남지 않았다.


그렇게 또 무고한 이들끼리 다투고 말았던 어느날 밤, J여사는 열두 살의 아들의 손을 붙잡고 울며 속삭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래. 더 강해지라고 시련을 주시는거야. 


열두 살은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나를 조금 덜 사랑해주세요.



지금 생각해도 참 도발적이고 절절한 기도였다. 하나님의 사랑이 선물이고 축복이라 가르치는 기독교 전통에서 자랐음에도 당시의 열두 살은 이미 그 일방적 관계의 전환을 꿈꾸었고 나아가 문제투성이의 현실에서 납득 가능한 설명을 원했다. 기특한 열두 살이었다.



우리를 불가항력적으로 끌어안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가장한 폭력은 고통을 직시하거나 그로부터 해방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억압한다. 고난을 애정 어린 시험으로 둔갑시켜서는 이겨내지 못한 이를 동정하거나 매도한다. 나는 싸구려 동정으로 내 자존심의 값을 후려칠 수 없었고, 합당하지 않은 매도를 묵묵히 받아줄 만큼 순순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일방적인 사랑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이제 나에게 신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다. 비로소 이 고난은 나에게 애정도 시련도 아니게 되었다. 그저 고난 그 자체. 삶 그 자체로서 직시되었다.


그리하여, 
j여사는 내게 사과할 필요가 없어졌고
b씨는 내게 용서받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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