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더 이상 X밥처럼 살고 싶지 않아졌다.
우당탕탕 스타트업 적응기
1. 더 이상 X밥처럼 살고 싶지 않아졌다.
당시의 나는 포기를 수용하고 있었다. 애매한 경력, 살벌한 취업난 따위가 겁이 나 눈을 돌렸고 대신 매달 주어지는 소액의 기본 소득, 애인님의 안정된 직장, 마찬가지 그녀로부터 주어지는 여전한 애정과 묵언의 지지가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이따금씩 구직 사이트를 들춰보지만 거리, 직종, 전망, 급여 다양한 이유로 혀를 차곤 했다. 신 포도를 힐난하는 추잡한 여우 한 마리와 같았다. 심지어는 포기를 수용하는 속도에 점차 가속도가 붙어 더욱 빠르게 많은 포기들을 합리화하던 나는 어느새 나는 아주 단순하고 언뜻 보아서는 문제를 발견하기 어려운 짧은 질문에 맞닿아 있었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삶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으니까. 지금도 어떻게든 살아는 있으니까. 여전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아직 미래에 많은 세월이 남아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는 나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에 다다랐다.
해가 바뀐 지 얼마 안 된 무렵, 지난해의 실패와 포기들을 봄을 기약한다는 핑계로 대충 뭉개어두고 지내던 나날이었다. 아무리 갖은 핑계를 대도 더는 미룰 수 없게 된 약속에 나가야만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특별히 내 상황과 사정에 대해 묻지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그나마 내 처지를 덜 비참해 보이도록 설명할 문장들로 가득 차 있었다. 친구들이 현실에 부딪히며 겪는 어려움을 보며 ‘아 역시 모두가 힘들구나’라며 부딪히지조차 않은 내가 자위했다.
시간은 또 흐르고, 그래도 가장 자주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와 작은 언쟁을 가졌다. 언쟁이라고 하기도 뭐하지. 친구가 던진 농에 내 비참함이 들통날까 되레 화를 내버렸다. 되려 너무 변해버린 친구의 탓이라며 매도했다. 분명 그 어떤 서슴지 않는 말들도 우스개로 주고받던 사이였을 터. 각자의 처지가 변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처지를 따라 추락한 내 자존감이 문제였다.
일련의 사건들은 스스로의 처지를 외면하기 위해 쌓아뒀던 댐에 작은 틈을 내었다. 그 틈은 순식간에 더 큰 균열이 되었고, 댐은 너무 쉽게 무너져버렸다. 평일 낮 집 앞 골목길을 바삐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일 내 꼴이 우스워 집 안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태우고 본 거울에 비친 정돈되지 않은 자신에게서 그간 외면했던 모든 사실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X밥이 됐지”
혹자는 그것이 근거도 없이 지나치다고 비난했을지 모르나, 나로서는 나름의 과정들을 거치며 얻어낸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자존감’이었다. 그 누가 뭐래도 꺾이지 않을 줄 알았고, 그만한 이유도, 근거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대략 2년에 걸친 비자발적 전업주부 생활(이라고 쓰고 반백수라고 읽는)은 나를 이 지경까지 끌어내린 것이었다.
자존감의 하락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고, 각자의 상황에 따라 회복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백수에게는 단 하나 가장 명확한 정답이 있었다. ‘돈을 버는 것’. 이제 그동안 거치적거리던 것들, 핑계로서 내 발목을 잡던 것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출퇴근 거리가 얼마나 멀던, 급여가 얼마건, 내 경력과 관련성이 있건 없건.
오히려 다른 것들이 중요해졌다. 내가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는 곳, 귀하게 쓰일 수 있는 곳, 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면서도 나를 발전시켜줄 수 있는 곳. 그리하여 이 X밥 같은 처지로부터 탈출시켜줄 디딤돌이 되어줄 곳.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스타트업으로 향했다. 비록 뚜렷한 전문성은 없어도 넓게 멀리 보는 내 시야가 갓 시작한 작은 조직에서 빛을 발하리라 믿었다.
몇 가지 최소한의 조건들을 필터에 적용하고 리스트에 뜬 첫 번째 회사부터 바로 지원했다. 지원에 앞서 회사의 면면, 대표의 이력이나 심지어는 개인 sns까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었다. 그리고 고민했다. 이 회사의 지향과 고민은 무엇일지, 거기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과거 거짓말 반 진실 반 섞었던 자소서와는 달리 구태의연한 거짓말들을 빼고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적어냈다.
그리고 며칠 뒤, 면접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