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호
나는 내 문학적 능력이 허락된다면 잠자기를 예찬하는 시를 줄줄이 쓰고 싶다. 잠을 주제로 한 예술작품을 보노라면 도리어 잠에 취하게 되고 그 창작자와 동일시되는 기분마저 든다.
잠은 내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나는 지금까지 아침에 잠을 단 몇 분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아침식사를 깨끗이 포기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약속이 없는 휴일에는 낮밤이든 식욕을 잊고 그저 계속해서 단잠에 빠져들기도 하며, 학생 때는 하루종일 공부를 하다가도 틈새를 노리고 몰려드는 잠을 굳이 이기려 하지 않았었다. 바쁜 생활에서 얻은 피로를 해결하는 것에 진심을 다했다. 인간의 모든 욕구 중에서 수면욕을 최상으로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렇겠지만 나는 특히 잠이 더 소중했다. 태초부터 잠이 많은 기질이기도 했지만 나는 일단 잠자면 자주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이 꿈들이 내가 잠을 예찬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나는 꿈 속에서 펼쳐지는, 나의 혼란스럽고도 멋진 무의식의 세계를 사랑한다. 반지의 제왕 못지 않은 판타지 소설 배경 속에서 용을 타고 날아다니는 주인공이 되다가도 어두운 밤거리에서 살인마에게 쫓기는 스릴러 무비의 주인공이 되어 공포 속에서 허우적대기도 하며, 얼굴 모를 누군가와 애정을 나누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꿈은 내 상상력의 보물상자이지만 한편으로는 내 무의식의 모든 감정이 투영되는 곳이다. 꿈 속에서 무의식 속에 침전되어있는 걱정과 불안, 슬픔, 분노, 기쁨, 애착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서. 감독의 관점에서 카메라 렌즈를 통해 객관적으로 그것들을 직면하고 만난다. 나는 이것이 잠의 신비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왔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매번 나의 적나라하고 처절한 감정을 대면하면서, 내가 사실은 이것들을 염려하고 슬퍼했구나를 알아차리며, 그렇게 나를 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기 싫어 마음 속으로 “더, 더, 한 시간만, 삼십 분만, 십 분만 더!”를 외친다. 그럴 때는 소위 주위에서 말하는 “거의 하루를 송두리째 날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겐 그건 시간낭비가 아니기 때문에 날린다고 표현하는 것은 다소 적절하지 않다. 과학계에서도 널리 알려졌듯이 잠은 뇌를 청소하는 행위이며, 몸의 모든 세포가 활발히 생동하면서도 동시에 휴식을 갖는 시간이다. 생의 괴로움과 번뇌를 깊은 심연 속에 묻어두고 평소에 몰랐던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즉 나는 매일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내 몸을 죽은 듯이 자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아침을 축하하기 위해서. 깨끗해진 나를 만나기 위해서.
나는 특히 잠 중에서도 낮잠을 가장 좋아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최초로 사랑 받은 순간 중 하나에서 유래되기 때문일 것이다. 낮잠에 대한 처음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서 시작된다. 그 때는 시원한 바람이 후욱 불던 어느 가을날 오후였고, 창가에서는 햇빛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내 눈가까지 두드리며 쏟아지던 햇살을 기억한다. 눈꺼풀 안으로 옅은 오렌지색 빛이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바깥에서 흩날리는 나무의 그림자에 따라 춤추듯이. 그렇게 서서히 의식이 깨어나지만 눈을 굳이 뜨려고 하진 않았다. 눈꺼풀 안에서 춤추는 오렌지색이 너무 예뻤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한편으로는 엄마의 냄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나는 엄마의 품 안에 있었다. 그녀는 나를 안고 얕고 긴 숨을 내쉬며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엄마의 긴 숨이 내 까만 정수리에 닿았다가 흐트러졌다. 나는 엄마의 그 숨을 몹시 아꼈다. 고유한 내 엄마만의 향기가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수많은 엄마 중에서 이 향으로 진짜 엄마를 가려낼 수 있을 정도로. 곧이어 내가 뒤척거리면 그녀는 바로 반응했다. 따스한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며 그녀가 말했다.
"더 자도 돼,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 말에 잠에 대한 무한한 통제권을 허락받은 양, 나는 씩 웃으며 다시 잠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엄마가 더 자도 된다고 말했으니까. 우리의 시간은 충분하며 자는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도 된다고. 너를 괴롭게 하는 굴레와 속박을 잠시나마 벗어버리라고. 그것이 엄마가 알려준 잠에 대한 최초의 정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