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내가 속한 회사에 이런 말이 있다. 일년차, 삼년차, 오년차, 칠년차에 마의 구간이 찾아온다고. 마의 구간이란 속된 말로 퇴사가 마려운 순간이라는 뜻이다. 선배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그 순간을 잘 버텨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후임이 그만두면 후임 몫의 일이 선배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어떻게든 후임이 그만두는 일만큼은 막으려고 한 말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느덧 나도 오년차에 접어든 직장인이 되었다. 나는 마의 구간에 접어들 때마다 오년차에 깔끔하게 퇴사하리라라는 마음으로 버텼다. 퇴사하는 날, 회사 사람들이 가득한 단체 카톡방에서 유명한 퇴사짤을 보내고 노비는 이만 퇴장을 하겠다고 외치는 상상도 하면서 말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오년차임에도 아직 퇴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퇴사를 하기엔 내 앞에 닥친 카드값과 대출 이자가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눈앞의 현실을 망각하고 퇴사가 생각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순간에 큰 기여를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상사이다. 올해 초에 새로운 부서로 인사 이동이 있었다. 그때 상사와 처음 만났다. 상사의 첫인상은 큰 키에 듬직한 체격을 갖고 있어 좋게 보였다. 팀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적극적으로 나서 도와줄 것 같았다. 마치 영웅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지 몇 개월 걸리지 않았다.
나의 일은 일종의 서비스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손님께서 상담이 필요하다면 상담을 해주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에 맞는 도움을 찾아 지원해 드리는 일이다. 대부분은 지원에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간혹 일부가 본인의 기준보다 지원이 적거나 아예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가시 돋친 말이나 욕설이 돌아온다. 전화상으로 무례한 태도가 지속된다면 녹음을 하고 있으니 말씀에 주의해 달라는 경고의 말을 하고, 그럼에도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상담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리고 통화를 종료한다. 반대로 손님이 사무실에 찾아와서 난동을 피우면 담당자 혼자서 상대하기가 벅차다.
특히 나는 원활한 의사소통 지원을 위해 근로지원인(수어통역사)의 도움을 받고 있어서, 이런 상황이 올 때면 나에게 불리한 상황이 된다. 상담을 잘 받고 있다가도 본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담당자를 찾아오라며, 장애인에게는 상담을 받고 싶지 않다는 등 모욕적인 말이 돌아온다. 더 이상의 상담 진행이 어렵다면 할 수 없이 상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경험상 화가 난 손님에게 상급자를 데려가기만 해도 상황이 진정되는 경우가 있었기에, 상사에게 손님과의 자초지종을 설명드린 뒤 손님이 계신 곳으로 모시고 갔다. 손님은 상급자에게서 지원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 싶어 했지만, 슬프게도 나의 상사는 팀원들의 사업에 관심이 없었다. 되려 그 자리에서 나에게 그 사업이 뭐냐고 물어본 사람이었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이 되고 있지 않아 내적 한숨이 나왔다.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는 상황에 나보다 한 직급이 높은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오래 근무한 만큼 지식도 많고 노련했던 선배는 손님의 상황을 이해하고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에도 몇 번 있었다. 어느 날은 상담실에서 큰 소리가 들리니 내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화장실을 간다든가, 자리를 비우곤 하셨다. 수가 빤히 보이는 행동을 볼 때면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참 없었음을, 듬직한 체격이 아까움을 느낀다. 이것 외에도 면전에 대고 삿대질을 한다든가, 미혼인 여자 직원을 볼 때면 빨리 결혼하라고 부추기면서 정작 본인의 딸은 늦게 결혼하길 바란다는 등 망발을 늘여놓는다.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상사의 입을 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실상은 그러지 못해서 입을 앙 다물고, 나의 팔을 꽉 부여 잡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손이 나가 상사의 입을 때릴 거 같았다. 슬프게도 퇴사가 마렵다는, 나의 오년차 마의 구간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