넴릿
“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특수학교에 보내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주변 사람들이 특수학교를 다니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말했지만, 나의 부모님은 달랐다. 일반 학교에서 배울 점이 더 많이 있다고 생각한 듯 딸에게 교육의 기회를 넓혀주고 싶었던 걸까? 천 명이 넘는 나와 조금 다른 아이들이 있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막상 입학하고 보니 같은 반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이 생각만큼 원활하지 못했다. 부모님과 대화를 나눌 때 입 모양을 천천히 볼 수 있는데 교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매 40분 동안 수업하랴 뒤에서 떠드는 아이들을 챙기랴 바쁜 선생님의 입 모양도 천천히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심지어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가 두 눈이 쓰라렸다. 어느 순간 사람 얼굴이 아닌 커다란 초록색 칠판을 마주한 날이 더 많았다. 칠판 위의 글씨를 그대로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달달 외웠다. 다행히 시험 점수는 나쁘지 않았다. 선생님은 듣지 못하는데도 공부를 잘하고 말도 잘 듣는다고 칭찬해줬다. 칭찬을 받아도 남은 건 찝찝한 마음뿐이다.
그 마음을 내 안에 심고 점점 자라서 훗날에 특수교사가 되어 나와 같이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청각장애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려면 특수교육과가 있는 대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면접 날짜가 정해졌고, 구화보다 수어가 편했던 나는 수어통역 지원을 요청했다. 면접 당일이 되었고, 자동차 뒷좌석에 몸을 싣고 대학교로 향했다. 내 앞에 앉아있는 부모님의 응원에 힘입어 안 떨리는 척 애써 웃어보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나같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학생들로 득시글한 대기실에서 내 이름이 불렸을 때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하얘지는데 내 의지와 다르게 두 다리가 어느새 문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멈칫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뱉고 나서야 문에 노크를 했다. 면접장을 들어섰더니 교수님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앉아있던 부교수님 2명과 그들 옆에 수어통역사가 서 있는 광경이 펼쳤다. 그리고 그들 앞에 의자가 하나 있고 그 뒤에 화이트보드도 놓여있었다. 내 엉덩이가 의자에 붙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특수교육과를 진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억에 남는 봉사 활동이 뭔가요?”
“내신 성적 중에 영어 점수도 높은 것 같은데 몇 등급이 나왔어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12년 동안 일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뭘 배웠는가 였다. 지금까지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을지 사람들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각양각색의 입 모양을 분석하는 데 급급하거나 아니면 온갖 문자들을 읽고 이해가 될 때까지 또 읽거나 바깥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는 것에만 쏠려 지내왔다. 태어나서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자리에서 오로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일이 또 있었을까 싶었다. 면접을 앞두고 예상 질문들을 통해 미리 연습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횡설수설하느라 등줄기에서 진땀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이 엉뚱한 데로 튀어나가더라도 멈추지 말고 끝까지 답변하자는 마음을 먹고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았다. 마침 가운데에 앉아 있는 교수님이 영어로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말했다. 예상 밖의 전개에 손끝이 얼어 버렸다. 30분에 맞춘 타이머가 손쓸 새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껌이 찰딱 붙어 진득거렸던 것처럼 의자에서 힘겹게 일어나 뒤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적기 시작했다.
‘Hello, My name is’
수어통역사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그 필기하는 행위를 제지하며 말로 하라는 교수님의 요구를 통역해줬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고 수어통역사한테 재차 물어보지만 한 글자도 빠짐없이 똑같은 내용을 전달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보드마카 뚜껑을 닫고 다시 의자에 앉아 굳게 닫힌 입술을 오물조물하며 열었다.
“헬..로..우.., 마이.. 네..임.. 이즈.. 킴… 마이.. 호비.. 이즈..”
엄마가 영어 발음 기호표를 읽는 법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모르는 영어단어가 나올 때마다 영어사전을 펼치고 뜻, 유의어, 발음 기호표까지 읽곤 했다. 거기서 봤던 발음대로 애써 소리를 내보지만 내 영어 발음이 우스꽝스러운 게 아닐까, 심지어 내가 알 리가 없는 내 목소리도 이상하게 들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과 함께 금세 움츠러들었다. 잘 들었다고 멈추라는 교수님의 손짓하는 모습과 동시에 타이머가 울렸다. 면접이 어땠냐는 부모님의 물음에 입을 열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과 함께 탄 자동차 안에서 창문을 내려 그 위에 기대어 말없이 오래도록 밖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눈물과 콧물을 흘려 보냈다. 나와 같은 꿈을 가진 친구와 함께 입시 준비하면서 우리가 30대가 되면 멋진 특수교사로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별것 아닌 상상에 수선을 떨었지만 힘차게 부는 바람에 내 꿈도 흘려 보냈다.
몇 년 사이에 훌쩍 교직에 몸을 담은 지 거의 10년이 되가는 친구와 만나는 날이 기다려진다. 그 친구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거북이 같다면서 느리지만 분명 잘하는 점이 있을 거라고, 육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느리지만 바다에서는 누구보다 빠르다고, 자기가 바다 같은 사람이 되어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저마다 꿈을 펼쳐나가도록 해주고 싶다고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주면서 매번 보람을 느낀다는 친구의 이야기에 그지없이 마음이 흐뭇해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