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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

소란

by 핸드스피크

“딸~ 엄마, 아빠 지금 서울 올라갈게.“

비상이었다. 구미부터 서울까지 운전해서 오겠다는 부모님의 연락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마음이 조급했다. 본가에 있는 나의 방을 돼지우리라며 불린 전적이 있었기에 적어도 사람이 사는 집처럼 보이게끔 깨끗하게 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치우지 않으면 부모님이 치울 게 뻔했다. 가뜩이나 장거리 운전을 해서 오는데, 더 고생 거리를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4시간 남짓이었다. 무엇부터 할지 머릿속에서 우선순위를 정리하며 미션을 해치우듯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우선 빨래 건조대에 걸려있는 옷을 걷고 밀린 빨래를 돌려야 했다. 세탁기가 일하는 동안 가전 위의 먼지를 털고,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청소기로 돌렸다. 그다음은 바닥에 광을 내듯 물걸레질을 했다. 이마와 콧등에 저절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여기까지만 하고 쉴까’라는 충동이 들 때, 내가 하지 않으면 부모님이 할 것 같은 생각에 쉴 수가 없었다. 화장실 청소까지 끝내고 땀에 전 몸을 씻고 나오니, 몸은 피곤할지라도 기분은 상쾌했다.

현관 인터폰 화면으로 보이는 얼굴에 자연스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집에 들어온 부모님은 딸과의 반가운 인사도 잠깐,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천천히 탐색하듯 훑어보았다. 부모님이 매의 눈을 가진 건지, 내가 부모님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건지 정자 씨는 "하이고, 이게 치운 거가?"라고 말한다. ”내 나름대로 청소했어“라고 항변을 해보지만, 미처 청소하지 못한 소파 밑, 창틀 같은 부분을 쏙쏙 골라서 지적하니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정자 씨는 걸레를 가져오라며, 오자마자 창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시득 씨는 차에서 조용히 공구를 가져오더니 나사가 헐렁한 가구를 손보고 있었다. 부모님을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건만, 나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나 보다.

그들은 딸이 어엿한 어른의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대하듯 염려했다. 아침에 혼자서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지, 요리도 못하는 게 밥은 제때 챙겨 먹을지, 집안일은 제대로 하려는지 등에 대하여. 특히 정자 씨가 유독 걱정하였다. 자취를 시작하고 그녀에게서 하루에 세 번의 연락을 받았다. 아침에는 "아침 먹었니?" 혹은 "출근 잘했니?" 점심에는 "점심 먹었니?" 저녁에는 "퇴근했니?" 혹은 "저녁 먹었니?"라는 연락으로 딸의 안부를 확인할 정도였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청소를 마친 정자 씨는 집에서부터 가져온 반찬을 넣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그와 동시에 잔소리가 봇물 터지듯 시작되었다. "대체 뭐 먹고 사는 거니. 이건 보내준 게 언제인데 아직도 있는 거니. 탄산음료 그만 먹어라. 이건 버려."라고. 쉴 새 없이 걱정 어린 잔소리를 하는 그녀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입모양을 봐야만 말을 알아볼 수 있기에 내가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잔소리도 멈췄다. ‘이제 그만하겠지’라고 생각이 들 때쯤 실눈을 뜨면 맞은편에서 내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잔소리도 다시 시작되었다. 오늘 하루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부모님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반찬들로 배불리 배를 채운 후 동네 구경 겸 산책을 갔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부모님을 뒤따라 걸으며, 그들의 뒷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어렸을 적에는 산처럼 커 보이던 부모님의 체구가 이제는 작아 보였으며, 그들의 머리에는 하얗게 센 흔적이 가득했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으니 손등에서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고, 시선을 더 위로 올리니 주름살이 자리 잡은 얼굴이 보였다. 그간 시간의 흐름을 잘 느끼지 못했는데, 그들의 얼굴을 보니 비로소 체감이 되었다. 나도 나이가 드는 만큼 그들도 나이가 들고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와 그들 사이의 시간은 줄어든다는 생각에 슬픔이 밀려왔다. 부모님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슬픔으로 얼룩지게 하고 싶지 않기에, 떨리는 입술을 감쳐물며 슬픔을 삼켰다.

부모님을 배웅하고 홀로 남은 집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았다. 진미채볶음, 고추장아찌 등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 가득하던 냉장실, 넉넉하게 얼려둔 밥과 소분된 고기와 야채들 천지였던 냉동실, 포대기 안의 쌀을 페트병에 옮겨 담아준 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테이블, 먼지 한 톨 없는 집. 굳이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눈에 보이는 그들의 사랑에 코가 시큰거렸다. 그제야 산책 때 애써 참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의 사랑을 오래도록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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