넴릿
말다툼이라고 하기엔 소리만 없을 뿐, 서로를 향한 손짓이 점점 커졌고 두 얼굴은 붉어졌다. 수어를 하는 팔의 움직임은 더욱 거칠어졌고, 서로의 격한 감정만큼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야, 너희 진짜 그만 좀 싸워!"
친구가 웃음을 터뜨리며 나와 준의 귓불까지 붉어진 얼굴 사이로 손을 휘저었다.
"너희 진짜 웃긴 것 같아. 가만 보면 서로 배려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근데 왜 이렇게 고집불통이야 둘 다? 제발 누구든 한 명만이라도 양보해 줘."
웃음을 멈추지 못한 친구의 중재에 허공을 휘젓던 우리의 손짓이 주춤했다. 그때 불현듯 픽 하고 헛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러고 보니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나와 준의 첫 다툼은 의외로 작은 일이었다.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던 날이었다. 호수공원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그가 내 가방을 들어주려 했다. 평소처럼 사소한 것 하나까지 챙기려는 준의 마음이었을 텐데, 나는 그냥 내가 직접 들고 싶어서 괜찮다며 사양했다. 하지만 그는 완강했다. 가방끈을 잡고 거의 빼앗다시피 하는 준의 손길에 나는 가방을 등 뒤로 바짝 당겼다.
어린 시절부터 농인이라는 이유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타인의 배려를 늘 받아왔다. 내가 직접 소통하고 싶은데도 누군가 나서서 대화를 가로챘다. 심지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조차 미리 걱정하며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 배려가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작은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불편함은 마음속 찌꺼기가 되어 가슴 한구석에 쌓여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머리가 크면서부터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하려 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먼저 내 방식대로 소통하려고 시도했다. 표정을 곁들인 몸짓으로 표현하고 필담을 하거나 핸드폰 메모장에 자판을 쳤다. 일상적인 대화든, 식당이나 카페에서의 주문이든, 업무든 상관없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도 일단은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 그런 습관이 오랫동안 고질병처럼 굳어져 준과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도 쉽게 의지하지 못했다.
가방이 무겁지 않으니 내가 들고 싶다고, 혹시 어깨가 아프면 그때 부탁하겠다며 애써 웃으면서 그를 달랬다. 하지만 순둥순둥한 인상에 언제나 온화할 것만 같았던 그의 얼굴에서 온기가 가셨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생각했을까. 평소의 그답지 않게 굳어버린 표정이 낯설게 다가왔다. 나 역시 내 의사를 무시당한 것 같아 버스 도착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배려와 고집의 경계가 이토록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을. 둘의 미묘한 다툼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끈질기게 몇 년째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 중 우연히 만난 프리다이빙의 매력에 빠져 레벨4 과정까지 준비하게 됐다. 바닷속 세상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준과 함께 나누고 싶어 프리다이빙을 권했다. 물이 낯설어서 선뜻 내키지 않아 하던 그도 결국 나와 함께하는 취미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입문 단계인 레벨1을 시작했다. 처음엔 물속에서 통나무처럼 뻣뻣할 정도로 둥둥 떠 있었지만, 이제는 제법 물개처럼 자연스럽게 헤엄칠 수 있게 되었다.
그날도 준과 함께 풀장으로 갔다. 이곳은 원통형 구조에 푸른빛 타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심은 12층 높이 아파트와 맞먹는 35m였다. 한동안 수면 가까이에서 호흡 연습을 하다가 조금씩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스노클 아래쪽 마우스피스가 두 동강 나듯 분리되어 버렸다. 안전을 위해 내 스노클과 바꾸자고 권했지만, 풀장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리된 스노클을 손보는 데 집중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네가 아직 초보인데 망가진 장비로 들어갔다가 사고 나면 어떡해. 내가 경험도 많고 보조강사 준비하고 있으니까 그냥 내 거 써."
나는 끝까지 설득했다. 하지만 준은 3시간에 6만원이라는 비싼 입장료와 제한된 이용 시간이 신경 쓰였는지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됐어. 네가 무슨 보조강사냐, 웃기지 마."
그는 아마도 내가 고장 난 스노클로 불편하게 다이빙하는 걸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준의 퉁명스러운 말에 내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을 깨물며 물속에 있던 내 손이 나도 모르게 올라갔다. 그의 손에 있던 스노클을 거칠게 낚아채자 차가운 물이 팡 터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면을 세게 내리친 물보라가 준의 얼굴까지 튀었다.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에이씨" 하고 한숨을 쉬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본체만체했다.
"아직 레벨1이니까 다이빙 파트너분 스노클로 바꿔 쓰시는 게 안전할 것 같네요."
숨을 죽인 채 이 상황을 지켜보던 강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는 서로의 스노클을 바꿔 남은 시간 동안 다이빙을 했다. 평소라면 즐거웠을 텐데, 그날은 그저 그런 다이빙이었다. 이용 시간이 다 돼서 물 밖으로 나와 탈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며 샤워하는 동안에도 아까의 모든 순간이 동영상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칼은 그대로 젖은 채 출입구로 나가는데 준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강사에게 자세히 듣고 나서야 레벨4가 프리다이버로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이고, 거기서 다른 사람의 안전도 살펴볼 수 있게 배운다는 걸 이해한 듯했다. 그는 이전과 달리 조금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레벨4가 보조강사 과정이라고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아서 몰랐어. 아까 화낸 거 미안해."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사랑을 배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수공원으로 가던 날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준의 고집도, 풀장에서 스노클을 바꾸자는 내 고집도 모두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다만 그 마음을 전하는 방식이 서툴러 오히려 다투게 된 것 같다. 친구의 말처럼 우리는 다르면서도 참 닮았다. 수년에 걸친 시간 동안 그는 내가 의지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를, 나는 준이 유난히 챙기려 드는 이유를 조금씩 알아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준의 따뜻한 마음을, 준은 내가 스스로 하려는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여전히 우리는 다투지만, 이제는 그 다툼조차도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