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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못 보내

귤귤

by 핸드스피크

나는 그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실제로 존재한다니! 그리고 그것이 내게 일어나다니! 사건의 발단은 대학교 1학년, 동아리 홍보를 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회원 모집을 위해 같은 동아리 임원인 친구와 광장에서 동아리 홍보를 했다. 친구들과 같이 온 그는 이미 작년에 가입했으며,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일순간 그의 주변이 일렁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끈한 까만 피부, 오똑한 코와 동글동글한 광대, 위로 올라간 매력적인 입꼬리와 두툼한 입술, 환하게 웃으면 보이는 가지런한 건치와 입 동굴, 양쪽 볼이 쏙 들어가는 보조개… 그는 귀여움과 잘생김이 공존하는 전형적인 훈남 스타일이었다. 눈썹이 보일 만큼 짧은 머리에 남색 맨투맨 티, 청바지가 참 잘 어울렸다. 그와 나누는 대화가 편하고 즐거웠다. 별 내용이 아니었는데도. 그래서 초면에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로스트」에 나오는 ‘대니얼 대 킴’을 닮았다고 놀렸다. 그는 나 때문에 대학교에 다니는 내내, 심지어 졸업하고 나서도 ‘대니얼’이라는 별명으로 살아야 했다. 그가 떠나고 나서 나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홀린 듯이 말했다. “와, 아까 그 사람. 완전 내 스타일인데?” 친구는 그의 보조개에 빠져 허우적대는 내가 신기하고 웃겨서 깔깔깔 웃었다. 안타깝게도 그에게 품은 호감은 금방 끝나버렸다. 친구가 은밀하게 그의 애인 여부를 수소문하고는 애인이 있다는 슬픈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아리 회원 관리를 위해 받은 그의 전화번호를 ‘대니얼 윤’으로 저장했다. 우리는 10년 동안 친구로 지내며 각자의 애인과 연애를 했으며, 서로를 스쳐 간 애인들을 알았다. 심지어 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연애 상담을 하다 펑펑 운 전적도 있었다. 그는 울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러다 서로 애인이 없는 시기가 맞물렸다. 그와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대학교 1학년으로 돌아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좋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였는데, 어느 순간 피어오른 연정을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에게 당돌한 데이트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세 번째 데이트 때 그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기차에 타려는 그를 붙잡고는 좋아한다고, 친구 이상의 사이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해버렸다. 생각해보고 말해달라고 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도망쳤다. 며칠 후 그에게 연락이 왔다. “답이 늦어서 미안해. 나도 민영이가 좋아. 우리 예쁘게 만나보자.” 나는 카톡 메시지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그를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와 사귀자마자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대니얼 윤’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내 짝꿍’으로 바꿨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대니얼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의 애인이었던 사람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아도 일절 묻지 않았다. 질투가 많은 내 성격으로 분명 평생 기억하고 말 것이다. 떠오르는 여러 질문을 애써 판도라의 상자에 잘 봉인해두었다.


내 남자친구가 된 태혁을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자리를 만들었다. 우리가 사귄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결혼 날짜도 잡았다고 알렸다. 친구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며 결혼을 빨리 추진한 이유를 물었다. 우리는 대답했다.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고. 경악한 그들 앞에서 우리는 장난스럽게 축배를 들었다. 태혁은 내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주량을 넘긴 줄도 모르고 계속 마셨다. 술 냄새를 폴폴 풍기는 그가 낯설면서도 애잔했다. 그는 평소에 술을 많이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술자리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밤공기가 쌀쌀했지만 그의 손이 참 따뜻했다. 술에 많이 취한 것 같다는 나의 걱정에 그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정도면 내일 필름이 끊길 것 같으니 혹여나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물어봐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왜 좋아? 어디가 그렇게 좋아?”, “세 번째 데이트할 때는 아직 나 안 좋아했을 때라고 했으면서 꽃은 왜 준 거야?” 등 시시콜콜한 질문을 하다 문득 태혁의 연애사가 떠올랐다. 판도라의 상자가 거세게 움직이고 있다. 이제는 열어야겠다. 후폭풍으로 다가올 질투보다는 당장의 호기심을 견딜 수 없었다.


“그분하고는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돼?” 나의 질문에 태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아이가 무심코 했던 말이 생채기로 남았나 봐.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 괜찮았어. 결국은 내가 삐쳐서 헤어진 거지. 뭐.” 그 아이의 실수를 본인의 탓으로 돌린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한동안 힘들어했던 사실을 안다. 헤어진 지 일 년 정도 됐을 때 태혁은 다시 그 아이를 찾아가 비로소 매듭의 끝을 지었다. 내가 아는 그의 성격은 헤어지면 끝일 텐데, 다시 만나고 올 정도라면 정말 사랑했던 건 아닐까? 만일 내가 그 둘의 사이를 방해하고 있는 거라면? 그분이 우리의 결혼 소식을 알고 태혁에게 연락해 온다면? 태혁이 조금이라도 흔들리거나 나와 결혼하는 데 망설임이 피어오른다면? 그 생각에 머물자마자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말을 내뱉고 있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그분이 우리 결혼 소식을 듣고 연락해서 오빠를 붙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빠가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나는 마음이 너무너무 아프겠지만 그래도 오빠의 행복을 위해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

“..........”


우리가 헤어진 미래가 저절로 상상이 돼서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벌써 괴로웠다. 나는 정말 그의 행복을 위해 보내줄 수 있을까?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행복보다 그의 행복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당장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겠지만 나는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불행해도 괜찮기 때문이다. 태혁은 방바닥에 엎드려서 ‘또 만약에 게임이야?’라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바라보다가 점점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나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갈색 장판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태혁은 울고 있었다. 마치 비에 젖어 애처로운 강아지처럼.


“왜 나를 그렇게 쉽게 포기해? 너무 속상해.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내 과거를 다 알고 있어서 그런 생각까지 한 거잖아? 미안해. 그래도 나 버리지 마. 나 포기하지 마.”


맞다. 사실 나는 말하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진심이 아니었다. 나는 절대로 이 사람을 포기할 수 없다. 황급히 그를 안아주면서 눈물을 닦아줬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알 수 없는 짜릿함이 밀려왔다. 나를 위해 우는 사람이라니! 나를 향한 사랑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미안해. 말하다 보니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나 절대로 오빠 못 보내. 지구 끝까지 오빠를 안 놓치고 쫓아갈 거야.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응?”


태혁은 다음날 우리의 대화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 정도면 내일 필름이 끊길 테니 다 기억 못 한다고 했으면서! 태혁은 그 뒤로도 일주일 가량 토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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