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호
11월의 겨울밤, 뻣속까지 시린 바깥 바람을 안고 네가 우리 집에 왔다.
너는 말했다. 빼빼로 데이를 기념하여 직접 만든 초콜릿을 애인에게 주고 싶었으나 늘 그렇듯 애인이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했다고. 그래서 애인이 사는 동네로 가서 놀이터에서 주고 한 시간을 이야기하다, 다시 두 시간 걸려 돌아와야했다고 말이다.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이 되면 힘들어했던 너에게 이 길이 얼마나 고단하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지 짐작했다. 너는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조차 주지 않는 애인에 대하여 한참을 말하다 갑자기 울었다. 그 눈물 속에서 수많은 감정을 읽었다. 귓속이 웅웅 울리고 몹시 뜨거운 듯도 했다. 우는 너를 보며 내 안에서 들끓는 그 애인에 대한 분노를 잠재우려 애쓰다,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를 위해 울어주는 것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는 옛날부터 사랑에 정열적으로 임했다. 상대에게 옷, 신발, 목도리 등을 선물하고 신뢰와 애정, 진심까지 모두 퍼부어주었다. 상대의 잘못으로 상처받거나 헤어져도 계속해서, 그럼에도 다시 사랑해보려고 했다. 너는 동아리방에서 공부하다가도, 밥 먹다가도, 기숙사에서 자다가도 울었다. 이 시기의 너는 후줄근한 과잠바를 입고 벌겋게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만나곤 했다. 나는 너의 죽지 않는 사랑의 기이한 생명력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늘 궁금했다.
우리 집에서 네가 한참을 울다가 돌아간 그 날 밤, 꿈 속에서 너를 보았다. 사랑을 아직 모르던 스무살의 너는 말갛게 웃었다. 우리가 자주 갔던 찜닭집과 떡볶이집, 네가 학생식당에서 습관처럼 먹었던 순두부찌개, 시험 전날 동아리방에서 밤을 새며 먹었던 김피탕을 생각했다. 공부하기 위해 ‘수다 금지’ 조건으로 내걸은 벌금 1천원을 서로 연거푸 내며 수다를 하다가 모은 돈으로 결국 편의점에 갔던 날도 떠올렸다. 새콤달콤을 사서 나눠먹으며 꿈을 말하고 슬픔을 이야기했던 학교 뒷길을, 전등 하나뿐인 외진 길에서 수많은 별을 헤아리며 걸었던 그 밤들을 기억한다. 나는 너와 과거를 여행했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 또다시 울었다. 네가 나처럼 이 모든 것을 기억하길 바라는 것이 이유였다. 우리의 추억을 생각해주길 바란다. 너를 낳고 기르며 손짓 발짓 하나하나에 기꺼워했던 부모를, 너의 다정한 안부인사로 인연을 이어간 선후배들을, 네 특유의 재치와 유머에 까르르 웃던 친구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네가 자란 고향집과, 집에 들어가면 풍기는 밥냄새와, 매일 보는 파란 하늘과 꽃과 낙엽과 손가락 사이로 스쳐가는 갈대밭까지, 사소한 것에도 아이같이 좋아하던 너를 떠올려주면 좋겠다. 너를 아프게 한 사람이 아니라 너를 아끼는 이들이 늘 여기에 있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 때 눈물로 얼룩진 시야 속에서 어떤 장면을 보았다. 너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누군가의 손을 잡으며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풍성한 꽃들 사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멀지 않은 너의 미래임을, 동시에 간절한 내 바람이 만들어낸 환상임을 직감했다. 그 옆에서 너를 웃게 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 이였다. 그 미래를 잡아보듯이, 두 손을 모아 빌었다.
몇 년이 흐른 후, 나는 미래에서 보았던 그 현장 속에 서 있었다. 너를 앞에 두고 축사의 형식을 빌려 수어로 꼭꼭 눌러담듯 내 마음을 고백했다. 순식간에 북받쳐오르는 내 복잡한 감정을 너는 이해하기라도 한 듯, 새하얀 미소를 보여주었다. 스무살의 네가 짓던 바로 그 맑은 웃음을 보며 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떨리는 오른손으로 턱을 감싸 쓸어내리고 두 손을 양쪽으로 쥐었다가 폭죽을 터뜨리듯 위로 펼쳤다.
“축복해, 너의 앞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