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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일 Jul 01. 2024

소설 쓰기의 감각

원고지 300매를 버렸다 

소설을 쓴 다음에는 다른 소설을 쓴다. 그다음에는 또 다른 소설을...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솔직히 거짓말이다) 지난 몇 년간 이 무한 루프에 갇혔다. 물론 매일 하루키처럼 원고지 10매를 쓰는 건 아니지만. 막상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을 쓰고 싶다, 혹은 써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소설의 소질이 보이는 상상은 도처에 깔려 있다. 다만 자주 당착하는 문제가 있다. 근데 나... 소설을 어떻게 썼더라? 원고지 80매는 도대체 어떻게 채운 거지? 완고 후에는 밤을 새워가면서 소설을 썼던 게 꿈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다시 소설을 읽으면 낯설다. 이거 진짜 내가 쓴 거야? 최근에는 그 감각이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나무야 미안해. 이런 책을 만드는 인간이 나빠. 책을 읽고 이런 말이 절로 나오는 사람이 다들 한 둘은 있지 않나? 적어도 나는 그렇다. 호기롭게 저런 글은 나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글 파일을 연다. 백지 위에서 깜빡거리는 커서. 그래,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단 쓴다. 자동적으로 올라오는 자기 검열을 무시하면서. 한 원고지 300매까지 썼나. 불현듯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것 같았고. 지금 새로 쓰고 있다. 쓰다가 지우고 쓰다가 버리고 쓰다가...


처음부터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짜고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그것도 어렵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절대자처럼 쓰는 인간은 아닌 듯하다. 첫 의도에서 너무 멀어진 소설이더라도 그게 더 좋다면 따르려고 한다. 그간 쓴 게 아까워도 그걸 바탕으로 더 값진 문장 한 줄이 나오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더 좋은지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감이다. 물론 그동안의 독서, 글쓰기, 크고 작은 배움으로 형성된 감각이겠지만... 나는 이를 정확하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감각이라는 건 추상적이다. 보이지 않는다. 이거 증명할 수 있긴 한 건가. 어쩌면 나, 사실 감각 같은 거 뭣도 없는데 혼자 있다고 착각하는 거면...? 그래도 나는 내가 좋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무엇을 기준으로 하냐고 질문한다면, 글쎄...


내가 가진 감수성은 조금 예민하다면 누구에게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적 감각이 특출난 것 같지도 않다. 최근 과제로 제출한 시 피드백을 받았는데, 리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다. 다시 읽어봐도 그 차이를 모르겠다. 어렸을 때는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재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지는 바람 아닐까?


나는 확신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간이다. 내가 지향하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마이웨이인데, 나는 자꾸 남의 것을 찾아본다. 그것이 소설이든 시든 일기든 영화든 만화든 유튜브든 다큐멘터리든 일단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소설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보여주는 장르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보여줘야 합니다... 허락받지 않은 타인의 삶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사전적 정의를 괜히 꺼내 찾아 읽는다. 그런다고 불안감이 해소되기는커녕 아리송해지지만...


소설을 쓸 때 이런 비효율적인 과정을 자주 거친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때도 쓰레기가 나올 때도 있다. 시간을 들인 만큼 어느 정도의 질과 양을 보장해준다면 참 좋을 텐데. 그치만 누가 시켜서 하는 고생도 아니고, 첫 번째 독자인 나를 위해 쓰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 이번 생은 이렇게 태어나버린 걸. 그래도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뇌에 챗지피티를 이식받으면 좀 더 수월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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