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문학 (3)

기린

by 해일

기린을 보기로 했었다. 1년 3개월 만이다. 그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예전에 우리는 매일매일 만났다. 평일은 학교에서. 휴일은 약속을 만들어서라도. 기린은 최근 채윤으로 개명했다. 역시 이름이 문제였던 거야. 이제 면접장에서 진짜 본명이냐는 질문 따위 받질 않아. 기린은 곧바로 서울의 직장인이 되었다.


그것은 기린의 원래 꿈은 아니었다. 기린은 음악을 하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밴드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하지만 어렵겠지. 기린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늘 이렇게 덧붙였다. 나에게는 아내가 없거든.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경제적으로 부양해 줄 수 있는 그런 존재 말야. 푸하하. 물론 나한테 그만한 재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술집은 시끄러웠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다른 테이블의 대화에 휩쓸려버릴 것만 같다. 기린은 전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얼굴에는 살이 조금 많이 붙었다. 새까맣게 물들인 머리, 말끔한 귀, 그 위에 차지한 다섯 개의 작은 구멍. 초췌한 낯이지만 입술은 붉게 반짝였다. 기린은 또박또박 큰 목소리로 메뉴를 주문했다. 평소 기린이 싫어하는 양산형 아이돌 음악이 흐르고 있음에도 그녀는 이를 지적하지 않고 건배를 제의했다. 우리는 맥주를 시작으로 치즈와 빨간 양념이 덮인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기린은 한숨을 푹 쉰 후, 말했다. 그것은 내가 이미 너무 잘 아는, 그저 그런 별 얘기들이다. 쳇바퀴 도는 일상, 벌레가 나오는 사무실, 시대착오적인 언행, 기대 없는 내일, 적은 임금과 시간… 기린은 상기되었고, 입을 멈추지 않았다. 떠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너는 요새 어떻게 지내?

아. 그만뒀어.

진짜? 왜?


갑자기 기린이 진지해졌다. 내가 말을 잇지 않자 대답을 캐내기 위한 질문을 추가한다. 이유를 묻는다. 방향을 묻는다. 계획을 묻는다. 나는 맥주를 다 비웠다. 기린이 납득할 만한 답변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다. 퇴사는 축하할 일이지.


너는 언제나 회사 다니기 힘들어했잖아. 기억하고 있다고. 기린은 다정하게 덧붙였다. 늘 그렇듯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내가 쏠게. 옛날처럼 내일이 없는 것처럼 먹자고.

푸하하. 다 늙은 체력으로 무슨. 그리고 난 내일 출근한다고.


나는 27살에 죽을 거야, 커트 코베인처럼. 10대의 기린은 늘 그런 말을 달고 살았다. 지금 우리는 30살이 되었고, 그때처럼 죽음을 화두로 얘기하지 않았다. 기린이 과거를 세세하게 나열하는 와중에도. 나는 기린의 기억력에 새삼 놀랐는데, 우리가 1학년이 아닌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걸, 담임 선생님의 과목이 수학이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만약 너가 타임리프를 할 수 있어, 어떻게 할래?

비트코인을 사야지.


기린은 웃음을 지우고 결연하게 말했다.


나는 무리해서 술을 마셨다. 평소처럼 기린의 말을 들으며 적당히 반응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랬던 것도 같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지하철에 있었고, 모르는 역에 내렸다. 쓰레기통에 얌전히 토했다. 도착하면 연락해. 기린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았다. 내가 탔던 지하철이 막차였다. 고작 한 정거장을 지나쳐 왔을 뿐이니까. 집까지 걸었다.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서 그런지 술을 마시기 전보다 정신이 명료하다. 나는 계속 기린을 생각했다.


이제 집에 왔네. 오늘 즐거웠어. 또 보자.


문자를 전송했다. 기린은 이미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하루는 이제부터 시작했다.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글을 써야 했으니까. 평소처럼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열리지 않았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거나 119에 신고하는 등의 방법은 떠올리지 못하고 얼어버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녀였다. 처음으로 그녀의 뜬 눈을 보았다. 동공이 커다랬다. 그녀가 충혈된 눈알을 연신 굴리다가 입을 뗐다.


일단 들어와요.


그녀를 따라 나는 어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전까지 방에 없던.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밤중 나무 위까지 올라가 목을 맨 인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그때 두 손이 내 목을 감쌌다. 차고 부드러운. 악력에 점점 힘이 붙었고. 숨소리가 거칠었다.


너. 너가. 다. 망쳤어. 망했어.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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