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핑크솔트 Oct 25. 2024

경계선아이의 부모입니다

에필로그

어느 날 뉴스에, 우리나라 전체 인구 7명 중 1명이 경계선지능인 이라고 본 적 있다.

즉, 경계선지능인이 14% 정도 되는 수치이다.

한 학년에 200명이 있다고 가정하면 28명, 300명이라고 가정하면 42명이

경계선지능의 아이들이다. 

그나마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수치도 나오고 지원을 신경 쓰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는 중이다.


그렇다 나는 경계선지능인, 고기능자폐스펙트럼의 부모이다.

경계선아이의 부모인 나도 경계선에서 외줄을 타듯 불안이 일렁인다.

초등학교때와는 다른 의미로 중학생활은 격이 다른 큰 산임은 틀림없었다.

학교폭력에 대처해야 했고 아이의 외로움에 같이 슬퍼해야 했다.


주변 사람들은 갈길이 멀고 머니 일히일비 하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진정한 유리멘털이라 잘 되지 않는다.


혹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퇴사를 한 후 조금은 여유의 삶으로 돌아갔다.

몸을 돌보고 운동을 해서 잡생각을 날리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그리고 이 시간 또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시간임을 느끼며 하루를 보낸다.

어떤 순간에도 감사를 잊지 않기로 노력하며 지낸다.


나는 부모이기전에 다정한 관찰자, 조력자,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을 위한 파트터로 J의 곁을 지키기로 했다. 주변 상황이 중1 때처럼 만남의 축복이 있을 땐 멀리서 다정하게 바라보고 중2 때처럼 주변상황이 J가 견디기 힘든 상황일 때는 예민한 조력자 되어 방패가 되기로 했다.


아직은 대처능력이 미숙한 경계선 아이이기에 나는 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이다.

그중 정서적 안정은 경계선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경계선 아이의 부모는 학교에서 친구하나 없는 유일한 숨구멍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2년 동안 성인 발달장애인 주간활동센터에서 일을 했다.

사실 J가 장애등급을 받는다면 그 후의 삶 성인발달장애인의 구체적 삶이 궁금했다.

성인발달장애인의 삶은 유아, 청소년기에 얼마나 인지적으로 끌어올리느냐로 취업을 할 수 있는 상태와 못하는 상태로 나누어져 있었다.

또한 40대 이후 장애인은 부모 또한 인지기능이 노쇠하여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더욱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본인을 돌볼 수 있는 자립발달장애인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마 J가 장애등급을 받는다면 안정적으로 장애인일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돈 버는 일자리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 일자리는 4시간 최저시급 이상의 일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 장애인 일자리는 바리스타, 단순포장직 등이다.

그 일자리에는 꿈이나 비전은 없었다.

경계선아이들은 장애인일자리에서의 관계가 사회적으로 만남이 다 일 텐데 본인과 비슷한 인지 수준의 장애인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나의 먼 미래에 J의 일터를 꿈꾸게 된다.

나의 배움에는 항상 J의 함께하는 시간이 있다.

J의 공부메이트를 하면서 시간이 계속적으로 확보가 된다.

그 시간을 활용하여 J와의 코로나시절 학교공부를 함께 하는 시간에는 사회복지사를 땄다.

사회복지사를 딸 때도 혹시 J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딴것도 있기 때문이다.


J는 나의 플랜 B이다.

나도 J의 플랜 B이다.

사회복지사로서 잠시 멈춤을 하고 있는 지금은 서로의 꿈을 위한 플랜 B를 가동 중이다.


"J야 너의 꿈은 뭐야?"

"엄마 나는 유튜브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어"

"어 그건 뭐야?"


유튜브에서 J는 단순한 캐릭터들의 사이다병맛의 애니메이션영상을 보내주었다.

딱 J의 스타일이다.

구독자를 보니 실버버튼을 받을 만큼 많았다.

그렇다 유튜브세대라 굳이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요즘 J는 주말에 한 개씩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숙하고 조잡하기도 하지만 본인의 개성이 뿜뿜 하다.

아직 꿈과 비전을 꿈꿀 수 있는 나이에 장애인일자리를 위해 맹목적으로 바리스타자격증을 따게 하고 20살이 되면 그곳으로 취업하라는 것은 사실 가혹하기 하다는 생각도 든다.


코로나 시대를 거쳐 4차 혁명의 일자리도 생겨났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키오스크를 발판으로 한 사업이다.

무인카페, 무인아이스크림, 무인문방구, 무인 편의점, 무인옷가게 등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자영업을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뜻은 사회성이라는 거대장벽을 넘길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이 열렸다는 의미이기 하다.

분명 경계선아이에게 희소식이다.

재고관리, 매출관리 정도의 업무를 계속적으로 훈련시킨다면 일자리로써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부모와의 협업하지 않는다면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

일단 계속적 업무를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가교역할인 사회복지사나 도움의 손길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계선 아이의 부모로서 아이를 어떻게 이끌면 좋을지에 대한 명확한 정답은 없다.

경계선 아이들의 사례도 천차만별이며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아이의 가치관이나 인격형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경계선 아이들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인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경계선 아이들도 사실 본인이 헤쳐나가고 싶어 하는 욕구도 가득 차 있다.

그 방법을 조금만 물꼬를 터주면 될 상황도 존재한다.

하지만 일반아이들보다 느리고 대처능력이 미흡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차단받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6학년 때 J의 장애진단을 받기 위해 여러 정신과에서 풀배터리검사를 진행하였다.

장애진단은 어렵겠다는 어느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남자의 경우 전두엽이 30살 전후로 완성이 되는데 J도 열심히 삶을 살아가다 보면 30살 전후로 일반적인 남성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잘 자라면 정말 T인 성인남성으로 보일 수 있다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희망과 희망고문이 같이 다가온다.

사실 이런 말은 들으면 아직 어린 나이에 장애등급으로 J의 가능성에 제한을 두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많은 경계선아이들은 장애등급을 받는 것으로 우울증을 겪고 그것으로 인해 품행장애로 나타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에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을 때 등급을 받는 것은 정말 예민한 문제 일 수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경계선아이의 부모는 중3 때 드디어? 장애등급을 받게 되었다.

그 덕에 가까운 곳으로 고등학교 진학이 가능하였다.

고등학교 수업을 따라가기엔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사회성은 일반아이들처럼 있던 아이는 특수학급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무척 창피하게 생각하였다.

특수학급에서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며 고3 때 취업을 알선해 주겠다고 하였다.

나의 지인은 이제 취업도 되고 군대문제도 해결되어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인의 아들은 폭탄발언을 하였다.

본인은 절대 장애인일자리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실습으로 간 일자리에서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았던 동료들과 함께 일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진짜로 산 넘어 산이다.

지인은 열심히 돈을 벌어 1인카페를 해야 하나, 같이 자영업을 해야 하나 다시 고민을 해야 했다.

곧 20살인데 집콕하는 생활을 하면 금방 퇴행이 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계선아이들은 방학기간만 되어도 금방 루틴이 깨져 인지,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저런 상황이나 사례들은 J에게 참고사항일 뿐이다.

나 또한 다른 경계선아이의 부모에게 참고사항일 뿐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이런 고충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 때문이다.

참고사항이라도 경계성부모에게는 꼭 필요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아이를 키우면 벽처럼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주변 경계선아이의 부모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서로 위로가 되어 산넘어 산을 기어코 넘고야 마는 부모가 되길 바래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