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엔티티 리스트’와 AI 반도체 전쟁
오늘날 한 국가의 AI 주권이 ‘법’의 조문 하나, 규정 한 줄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였다면 믿을 수 있는가? AI가 반도체라는 물리적 실체 위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본질적 사실은 법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통제하는 것이 곧 AI의 발전 속도를 제어하는 것과 같다는 냉혹한 지배 방정식을 만들어냈다. 상호이익과 효율성을 추구하던 전후(戰後) 자유무역 질서가 저물고 국가안보와 기술 주권을 앞세운 ‘신(新)중상주의’의 시대. 우리는 법이 어떻게 반도체라는 전장에서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무기가 되는지를 법의 프리즘으로 깊숙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1. 신중상주의와 엔티티 리스트 - 새로운 전쟁의 문법
AI 반도체 전쟁은 과거의 무역 분쟁과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며, 이는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중상주의는 국가의 안보와 번영을 위해 정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특정 전략 산업을 보호·육성하고 기술 우위를 확보하려는 현대적 국가 개입주의 경제 철학이다.¹ 자유무역주의가 상호 이익(win-win)을 추구하는 반면, 신중상주의는 국가 간 경쟁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고 자국의 절대적 이익을 위해 관세, 보조금, 그리고 수출 통제와 같은 보호무역주의적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²
이 개념이 AI 반도체 전쟁에서 중요한 이유는 현재 벌어지는 미·중간의 경쟁이 과거 WTO 체제가 상징하던 자유무역과 효율성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스르기 때문이다.³ 고성능 AI 반도체는 소수의 국가와 기업만이 설계하고 생산할 수 있어 공급망의 특정 지점을 통제할 경우 전체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초크포인트(Choke Point)의 특성을 가진다. 이처럼 AI의 지능을 구현하는 ‘두뇌’에 해당하는 반도체 기술의 발전 속도가 국가의 군사적·경제적 힘과 직결되기에, AI 반도체 경쟁은 신중상주의적 세계관을 더욱 강화한다.
미국의 ‘엔티티 리스트’는 이러한 신중상주의적 세계관을 가장 정교하게 구현한 법적 무기다. 이는 미국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Bureau of Industry and Security, BIS)이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외국 기업 및 기관을 소위 ‘무역 블랙리스트’에 올려, 이들에게 특정 미국 기술과 상품의 수출을 사실상 통제하는 행정 규제다. 엔티티 리스트의 법적 근거는 수출관리규정(Export Administration Regulations, EAR)에 있으며, 리스트에 등재된 개인, 기업, 연구기관 등은 ‘미국의 국가안보 또는 외교정책 이익에 반하는 활동에 연루되었거나 그럴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주체’들이다.⁴
엔티티 리스트의 작동 방식은 ‘사전 허가(License) 요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엔티티 리스트에 등재된 법인은 미국 기술 기반의 부품이나 소프트웨어를 구매할 때마다 미 상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이 허가 심사는 ‘거부 추정(presumption of denial)’ 방침이 적용되어 사실상의 금수 조치로 작동한다. 이는 AI 반도체 공급망에서 미국이 우위를 점한 특정 기술 지점을 차단하는 초크포인트 전략의 핵심이다.
이 무기를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규제의 역외 적용성(Extraterritoriality)이다. 특히 해외직접생산품규칙(Foreign-Direct Product Rule, FDPR)은 엔티티 리스트를 단순한 수출 통제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을 지배하는 무기로 만든다. 이 규칙은 미국의 법률이 세계의 공장들을 직접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하게 한다.⁵ 예를 들어 대만의 TSMC나 한국의 삼성전자가 자국의 공장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미국의 설계 소프트웨어(EDA)나 생산 장비를 사용했다면, 그 최종 생산품 역시 미국의 수출 통제 대상이 된다. 화웨이가 자체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반도체를 설계해도 FDPR 규제로 인해 TSMC가 이를 생산해 줄 수 없게 되면서 첨단 기술의 동맥이 막혀버린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⁶ 이는 특정 기업을 글로벌 기술 생태계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켜 서서히 고사시키는 현대판 기술 봉쇄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엔티티 리스트는 개별 기업을 제재하는 것을 넘어 중국의 AI 기술 발전 생태계 전체를 마비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법률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실질은 기술 발전의 혈맥을 차단하는 정교한 지정학적 공격이다. AI 반도체 공급망은 고도로 분업화되어 있으며, ‘엔티티 리스트’는 이 모든 연결 지점을 정밀하게 타격한다.
2. 안보의 논리, 동맹의 딜레마
미국이 엔티티 리스트 같은 법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자국 기업의 이익 극대화가 아닌, 중국의 AI 기술 굴기를 막고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명백한 안보적 동기에 기반한다. 이는 모든 국가가 이익을 보는 절대적 이익(absolute gains)의 시대가 가고, 상대방보다 내가 더 많은 이익을 얻거나 상대방의 이익을 막는 것이 중요해지는 상대적 이익(relative gains)의 시대로 회귀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모든 국가가 비교 우위에 따라 자유롭게 교역하면 모두에게 이롭다는 WTO 체제의 자유무역주의 원칙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과거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미국이 이처럼 강력한 신중상주의적 법률 무기를 사용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중국의 기술 굴기가 미국의 경제적 번영과 국가안보 모두를 위협하는 실존적 도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AI 기술은 그 자체로 경제와 군사의 경계를 허무는 ‘이중용도 기술’의 정점이므로, AI 분야에서의 기술 우위 상실은 곧 군사적·지정학적 우위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미국은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AI 반도체 전쟁은 단순한 시장 점유율 싸움이 아니라, 21세기 기술 패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안보 경쟁의 핵심 전장이다.⁷ 이에 미국은 더 이상 자유무역이라는 이상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엔티티 리스트와 같은 법적 무기를 동원하여 자국의 기술적 성채를 지키고 경쟁국의 추격을 차단하는 적극적인 전략으로 전환한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전략은 AI 기술이 미래 사회의 모든 의사결정 시스템의 기반이 되는 ‘메타 기술’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다. AI 반도체는 AI라는 디지털 두뇌를 움직이는 물리적 심장과 같으며, 이 심장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거나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없는 국가는 결국 다른 나라가 만든 AI 알고리즘과 플랫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기술적 종속’ 상태에 빠진다. 이는 국가의 국방, 금융, 교통 등 핵심 인프라의 운영을 외부의 통제에 맡기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한 국가의 국방 시스템이 외국산 AI 칩과 알고리즘에 의존한다면, 유사시 해당 칩의 공급이 중단되거나 숨겨진 ‘백도어’가 작동할 경우 국가 전체가 마비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법의 무기화가 동맹국과 제3국 기업들에게 규제 준수 딜레마(Compliance Dilemma)를 안겨준다는 데 있다. 미국법은 ‘역외적용’ 조항을 통해 제3국에서의 거래까지 통제하므로, 한국과 같은 동맹국의 기업들은 미국 시장과 중국 시장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 미국의 규제를 준수하면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을 잃을 위험과 중국의 경제적 보복에 직면하고, 중국과의 거래를 유지하면 기술의 원천인 미국과의 관계가 단절될 위험에 처한다. 이로 인해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생산 라인과 공급망을 ‘미국 중심 블록’과 ‘중국 중심 블록’으로 분리하는 ‘공급망 이원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되며, 이는 지난 수십 년간 효율성 위주로 구축된 글로벌 공급망의 근간을 뒤흔든다.⁸ 전 세계를 단일 시장으로 묶었던 효율성의 고리가 끊어지고, 안보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장벽이 세워지는 것이다.
3. 용과 독수리의 전투 – 중국의 반도체 자립 굴기 vs 미국의 법적·외교적 공동 전선
미국의 법적 공세에 맞서 중국은 거대한 자본과 시장을 활용한 ‘기술 자립’ 생태계 구축으로 대응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국가 집적회로 산업 투자기금과 같은 막대한 정책자금을 투입하여 반도체 생산시설 건설과 장비·소재의 국산화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⁹ SMIC, YMTC, CXMT와 같은 자국 기업들이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7나노 공정 개발에 성공하거나 메모리 반도체 생산량을 늘리는 성과를 보인 것은 이러한 국가적 총력 지원의 결과다.
‘가능성’은 중국의 거대한 내수 시장과 정부의 강력한 추진력에 있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소비 시장을 바탕으로 자국산 반도체의 수요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기술 개발과 양산을 반복하며 경험을 축적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최첨단 공정보다는 성숙 공정(legacy process)이 필요한 차량용 반도체나 가전제품 시장에서 먼저 자급률을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명백한 한계’ 역시 존재한다. 최첨단 공정에 필수적인 EUV(Extreme Ultraviolet, 극자외선) 노광장비나 첨단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 전자설계자동화) 소프트웨어와 같은 핵심 초크포인트 기술은 단기간에 따라잡기 어렵다.¹⁰ 또한 미국의 제재로 인해 글로벌 기술 생태계로부터 고립되면서 혁신의 속도가 더뎌질 수 있으며,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효율성과 수율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미국은 엔티티 리스트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국의 법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넘어 동맹국들과의 외교적 협력을 통해 다각적인 ‘공동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네덜란드, 일본과의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공조다. 미국은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기업인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pplied Materials)와 램리서치(Lam Research)를 보유하고 있지만, 최첨단 노광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이, 포토레지스트 등 핵심 소재는 일본 기업들이 강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수년간의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이들 국가가 자국의 수출 통제와 유사한 수준의 대중국 규제에 동참하도록 설득했다.¹¹ 이로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거의 모든 핵심 장비의 중국 수출을 차단하는 강력한 ‘기술 동맹’이 구축되었으며, 이는 미국의 법적 조치가 동맹국의 외교적 협력을 통해 어떻게 국제적인 규범처럼 확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과 파운드리 생산 능력을 동시에 갖춘 핵심 플레이어지만, 안보는 미국에, 시장은 중국에 깊이 의존하는 지정학적 숙명을 안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처럼 미·중 패권 경쟁의 가장 강력한 압박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에 동참해야 한다는 압박과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의 경제 보복 가능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전략적 딜레마’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지뢰밭 속에서 대한민국이 주권 국가로 생존하기 위한 길은 단순히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누구도 우리를 배제할 수 없는 ‘대체 불가 기술’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AI 반도체 전쟁의 파고를 넘기 위한 우리만의 항해술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가 압도적 우위를 가진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초격차를 유지하는 동시에, AI 연산에 최적화된 PIM(Processing-In-Memory)¹² 반도체나 첨단 패키징과 같은 차세대 기술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해야 한다. 즉, 우리가 현재 지배력을 가진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 차세대 AI 반도체나 첨단 패키징 기술처럼 미래에 새로운 초크포인트가 될 수 있는 분야에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둘째,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칩4 동맹(미국이 주도하는 한국, 일본, 대만을 포함하는 반도체 동맹) 등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우리의 이익을 관철하고, 동시에 EU·일본 등 다른 기술 강국과의 연대를 통해 외교적 지렛대를 다변화해야 한다. 기술이 곧 안보이고 외교인 시대, 우리의 기술력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이기 때문이다.
결국 AI 반도체 전쟁은 우리에게 익숙했던 세계화 시대의 종언과, 법이 국가안보의 무기가 되는 신중상주의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다. 안타깝지만 법(法)은 더 이상 자유무역의 중립적인 경기 규칙이 아니라, 신중상주의 시대 기술 패권 경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다. 이런 대변동의 시기에, 대한민국의 운명은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얼마나 명민하게 읽어내고 우리의 기술 주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
¹ Oscar Rodrigo Victoria Velasco, 「Neo-Mercantilism in The Semiconductor Industry: The Chinese Strategy」, Asian Journal of Engineering, Social and Health Volume 3, No.3(2024. 3.), p589.
² Ibid, p590.
³ Raj Bhala, 「The New Age of Global Trade: Aggressive Neo-Mercantilism」, The Diplomat, 2025. 3. 1., https://thediplomat.com/2025/03/the-new-age-of-global-trade-aggressive-neo-mercantilism/ (최종 방문일 : 2025. 8. 11.)
⁴ 「미국 상무부 Entity List」, 무역안보관리원, KOSTI 기초자료, 2024. 10. 29.
⁵ Ibid.
⁶ 「미국 수출통제 제도 심층 분석 및 시사점」, 코트라, Global Market Report 22-008(2022. 5.), 13쪽.
⁷ 과거 미국은 중국을 WTO 체제에 편입시켜 자유시장 경제의 일원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중국은 '중국제조 2025'와 같은 국가 주도 산업 정책을 통해 기술을 획득하고 이를 군사력 증강에 활용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졌다. 「중국제조 2025 추진성과와 시사점」,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2019. 1.14., 59쪽 참조.
⁸ 코트라, 앞의 보고서, 20-21쪽.
⁹ 오종혁, 「중국 제3기 반도체 투자기금의 특징 및 시사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경제 포커스 Vol. 7 No. 27(2024. 7. 3.), 3쪽.
¹⁰ 「中 갈륨·게르마늄 수출 통제로 보는 미·중 기술 전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CSF 이슈분석, 2023년 8월, 5쪽 참고.
¹¹ 「미국 수출통제 안내가이드」, 전략물자관리원, 2023년 12월, 48쪽.
¹² 메모리 내 연산(Processing-in-memory, PIM)을 말한다. PIM은 메모리에 연산 기능(프로세싱 기능)을 탑재하여 데이터 이동 없이 메모리 안에서 직접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게 한다. 이화여자대학교 AI Computing Platform Laboratory, 「Processing-in-Memory」, https://acpl.ewha.ac.kr/projects/pim/ (최종 방문일 : 2025.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