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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과 사학도의 만남

뒷목과 감탄 사이

by cm

지난 글에서는 사학도가 일상에서 만난 역사 중에서 사학을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난 얘기를 해보았습니다. 일상에서 역사를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다양한 콘텐츠의 소재로서 역사를 종종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건 역시 사극입니다. 오늘은 제가 만난 사극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얘기해 보겠습니다!


사학과 대학원을 간 뒤, 사극을 볼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고증 지적질'의 순간들이죠. 이게 저 혼잣말일 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럿일 때는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기도 하죠. 처음 몇 번은 다들 신기해하며 "오, 그래?" 하고 귀를 기울여주지만, 반복되면 이내 "좀 그냥 봐라",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잖아"라는 핀잔이 날아옵니다.


물론 백번 맞는 말입니다. 드라마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모든 장면을 사료에 기반해 100%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사료의 공백을 메우는 작가적 상상력은 필수적이고요. 우리 사학도들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저 '옥에 티'를 찾아내며 지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사극에서 '고증 지적질'을 하는 건 더욱 아니고요.


제가 사극을 보며 뒷목을 잡거나 혹은 감탄하는 데에는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사실과 같냐, 다르냐'의 문제를 넘어선, '역사적 상상력의 품격'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의 기준에서 이 '역사적 상상력의 품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편의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KBS에서 방영한 <고려거란전쟁>과 2017년 개봉 영화 <남한산성>입니다.


<고려거란전쟁>의 방영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기뻤습니다.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여요 전쟁을 공영방송에서 대하드라마로 만든다니! 초반의 압도적인 전쟁 장면과 고뇌하는 군주 현종의 성장, 양규의 죽음을 보며 '인생 사극'의 탄생을 예감했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는 길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현종과 원정왕후라는 캐릭터가 붕괴하는 모습은 당혹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사료 속 현종은 거란의 침입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피난을 떠나면서도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전란의 상처를 보듬으며 내실을 다져나갔으며, 원정왕후는 그런 현종을 누구보다 지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드라마 후반부로 가면서 현종은 지방 호족의 반란에 휘둘려 감정적인 결정을 남발하고, 원정왕후는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 강감찬, 그리고 지아비인 현종을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사료의 기록과 다르고, 드라마 초반에 쌓아 올린 캐릭터의 개연성마저 무너뜨리는 '나쁜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큰 줄기와 인물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드라마를 보며 뒷목을 잡았었죠.


반면, 영화 <남한산성>은 사학도로서 감탄하며 본 작품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단순히 '고증이 철저하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혹한의 추위, 남루한 군사들의 모습, 실제 산성의 지형을 살린 연출도 훌륭하지만, 진짜 백미는 사료의 행간을 파고드는 품격 있는 상상력에 있습니다.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최명길(주화파)과 김상헌(척화파)의 논쟁은 『인조실록』에 기반을 두면서도 적절하게 창작의 대사가 더해집니다. 영화 속 대사들은 거의 사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묵직하고 날카롭죠.


또한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은 두 사람의 표정, 고뇌, 그리고 성벽 아래에서 얼어 죽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비추며 이념 대립의 건조함을 역사의 현장감으로 채워 넣습니다. 영화는 어느 한쪽을 '선'이나 '악'으로 규정하지 않죠. 나라를 구하려는 두 충신의 서로 다른 길을 담담히 보여주며 무엇이 옳았는지에 대한 판단을 관객과 역사에게 넘깁니다. 이는 역사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좋은 상상력'입니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 인물을 폄훼하거나 역사의 흐름을 비틀지 않고, 기록된 사실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죠.


결국 우리가 사극에 바라는 것은 '박제된 역사'의 재현이 아닙니다. 사료라는 뼈대 위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과 고뇌를 불어넣는 생생한 표현을 원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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