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인생 그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by 회계사 에사 Esa

https://stib.ee/MbXH


네 번째 책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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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를 책망할 수는 없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한 사무실에서 이 말이 터져 나왔다.




어릴 적 나의 동력은 인정욕구였다. 남들 눈에 근사해 보이고 싶었다. 관계, 물건, 성취와 같은 것들이 내 가치를 올려줄 수 있다고 믿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로맨틱한 연애, 비싼 브랜드 로고, 높은 학점, 외모... 그것들을 덕지덕지 내 존재인 양 붙여놓은 공간이 인스타그램이었다. 이 다음 스텝은 커리어였다. 안전하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전문직을 해야겠다. 예상과 달리, 더 근사해지려 시작한 수험생활은 그동안 열심히 오려다 붙인 얕은 겹의 보호막들을 산산조각 냈다.




마지막 2차 시험이 두어 달 정도 남았을 무렵의 어느 날 밤, 절망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반복되는 실패, 성취를 핑계로 끊어낸 관계들, 업로드가 멈춘지 오래인 인스타그램, 그리고 처참한 수험생활 성적표. 수험생활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였다. 나는 망해가고 있었다.




밤을 지새우다 시선이 닿은 책장에서 눈에 띈 것은 20대 초반에 썼던 다이어리였다. 3개월마다 한 인물의 삶을 테마로 만들어졌던 그 다이어리는, 처음으로 삶에 대해 진솔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계기였다. 무슨 생각을 했더라, 궁금하면서도 다이어리를 펼치는 게 무서웠다. 과거의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는 내가 더 근사한 사람이 되어있을 줄 알았겠지?




하지만 어렵게 펼친 다이어리 속 내 생각은 의외였다. 그토록 인정을 갈구하던 20대 초반의 내가 간절하게 바랐던 것은, 외적인 성취가 아니라 단단한 내면이었다. 인정욕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그것은 지난한 수험생활과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 이미 내 마음에 자리잡은 것이었다. 더 이상 남들의 인정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인정받을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는 채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 다이어리를 본 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길을 완주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성공할 거란 확신도, 방향이나 속도에 대한 확신도 없는 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노력하는 것만 할 수 있었다. 역대급 난이도라 평가되었던 시험이 끝나고도, 채점 기준이 갑자기 바뀌는 등 악재가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웃기고 슬프지만, 합격하고 난 뒤에 간 놀이동산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 있는 그 어떤 놀이 기구보다 인생이 더 무서울 것이라고.




그러나 실제의 인생에 있어서는 만사가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필요에 쫓겨 명쾌한 결론 같은 것을 구할 때, 자신의 집 현관문을 똑똑똑 노크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나쁜 소식을 손에 든 배달부이다. ...


그러나 그것은 배달부 탓은 아닌 것이다. 배달부를 책망할 수는 없다.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불쌍한 배달부는 그저 위에서 부여받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에게 그 일을 주고 있는 것은 친밀한 리얼리티인 것이다. (221p)




합격 후에 잠깐 인생이 달콤하긴 했지만(발을 뻗고 잘 수 있는 것에도 감격했다) 그건 잠시였다. 인정욕구라는 동력이 사라진 채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더 높은 난이도를 자랑했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이 이상의 노력은 인생의 불공평함을 극복해야 할 만큼이라, 어쩌면 헛수고가 될지도 모를 노력이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한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령 불공평한 장소에 있어도 그곳에 있는 종류의 ‘공정함’을 희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공정함’에 굳이 희구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어떤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개인의 재량이다. (72p)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시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 하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남녀노소의 사랑을 받는 소설가이다. 그가 어떻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지, 어떤 태도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지 알게 된 계기는 달리기에 대한 그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재즈클럽을 운영했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나이는 서른이었다고 한다. 서른이 코앞인 내게 그의 시작이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이 성공한 소설가가 처음 소설가가 되었던 시점은 그리 무겁지 않다.




서른 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젊은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아났다. (53p)




다음 해 초봄, 문예지 <군조>의 편집부로부터 “당신 작품이 최종 심사 후보에 올랐습니다.”라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내가 신인상에 응모했던 일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날의 분주한 생활에 너무나도 쫓기며 살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들어서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네?’ 하고 의아스럽게 여긴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서른 살이 되어, 뭐가 뭔지 영문도 모른 채, 꼭 소설가가 되려는 확고한 의지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신진 소설가로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나도 놀랐지만, 주위 사람들은 더 놀랐을 것이다. (55p)




그는 소설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자 꽤 잘 운영되던 재즈클럽을 그만두고 소설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 리스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충고를 따를 순 없었다고 말한다. 어떤 시작이든, 어떤 과정이든 그에게 중요한 기준은 자기 자신,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러너가 되시지 않겠습니까?" 라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소설가가 되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모질게 비난을 받아도 내 방식을 변경한 일은 없었다. (228p)




그는 그저 자기가 하고 싶어서 소설가가 되었고 러너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 것인가?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것이 나의 육체이다.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26p)




전엔 압력이 명확했다. 시기에 따라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 취업과 같은 부담이 주어졌고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성취하는 데 나름 재능이 있었다. 외부의 압력을 잘 이겨낸 덕에 적당히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둘러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고 나만의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는 감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감각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실무적으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나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면 좋을 것인가? 얼마만큼의 휴양이 정당하고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휴식이 되는가? 어디까지가 타당한 일관성이고 어디서부터가 편협함이 되는가? 얼마만큼 외부의 풍경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얼마만큼 내부에 깊이 집중하면 좋은가? 얼마만큼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얼마만큼 자신을 의심하면 좋은가? (126p)




하루키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또 그냥 그러고 싶었기 때문에-시작한 달리기라는 행위를 소설 쓰는 행위, 그리고 삶의 메타포로서 써 내려 간다. 소설을 쓰는 것, 그리고 달리는 것은 하루키라는 개인에게 부여된 일종의 불공평함, 한계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정도를 조금씩 늘려나가는 것이다. 자신다운 삶에 대한 감각은 그 과정을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육체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이것이 나의 육체이다. 한계와 경향을 지닌 나의 육체인 것이다. 얼굴이나 재능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데가 있어도 달리 어쩔 수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냉장고를 열어 거기에 남아 있는 것만 써서 적당한(그리고 어느 정도 맛있는) 요리를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된다. 사과와 양파와 치즈와 우메보시밖에 없다고 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있는 것만으로 참는다. 뭔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132p)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간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122p)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어떻게 살지 모르겠어요, 같은 어렵고 어이없는 질문을 가지고 온 나에게 교수님은 두 가지 처방을 주셨다. 한 가지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의 조건은 첫 번째, 혼자 할 것. 두 번째, 산출물이 있을 것. 세 번째, 기한이 있을 것. 그리고 두 번째 처방은 지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48시간 이내에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구매한다거나 하는 것은 안 됨!) 48시간 이내에 실행하지 않으면 그 아이디어는 영원히 실행할 수 없는 것이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첫 번째 처방을 듣고 '제일 나답고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을 떠올린 게 이 프로젝트였고, 교수님이 달아주신 48시간의 시한폭탄 덕분에 서둘러 구독자를 모았다.




그리고 네 번째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프로젝트는 나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대답이 되어주고 있다. 책을 정하고 글을 쓸 때마다 한계를 느끼고 겁이 난다. 과연 이 글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이 일을 지속해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이 일은 내가 그만둘 수 없는 무엇, 그만둬야 할 이유가 수백만 개여도 소중히 단련한 하나의 이유로 지속해나갈 무엇이기 때문이다. 때론 지속함에 따라 오히려 후퇴하더라도, 어쩔 수는 없다.




내 몸이 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욕심을 내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116p)




레이스의 기록을 단축시키지 못한다 해도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달리면서 문득 한다. 나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었고, 시간은 정해진 만큼의 몫을 받아간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인 것이다. (44p)




내 육체란, 내 인생이란, 한계투성이에 불공평함 투성이라 반복되는 문제에 마주하곤 한다. 누구나 각자가 가진 콤플렉스가 거울에서 두드러져 보이고, 언제나 나보다 근사한 사람에게 부러움을 느끼고, 내 인생의 문제점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끔 심각해지면 '대체 이렇게 힘든 인생을 왜 살아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도달할 때도 있다. 아직 정답을 모르겠다. 그러나 달려보려 한다. 정답에 대한 생각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릴 때 무엇을 생각하냐'는 질문에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달리려 할 뿐이라 답한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45p)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가게 될 것이다. (1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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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Comment




무거운 책을 다룬 후 조금은 가벼워지고 싶어,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재밌는 문장이 많아 인용을 줄이려 했는데도 꽤 많네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니 인생, 그거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때 읽어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시선을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안쪽인 것이다. 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깊은 우물의 바닥을 보는 것처럼.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이 보일까? 아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 낡은 보스턴백처럼 그것을 둘러메고, 나는 긴 여정을 걸어온 것이다. 좋아서 짊어지고 온 것은 아니다. 내용에 비해 너무 무겁고, 겉모습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군데군데 터진 곳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짊어지고 갈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애착도 간다. 물론. (229p)




세계적인 소설가라 하면 그저 근사하고 화려할 것만 같은데, 그는 자신의 삶과 내면에 대해 '낡은 보스턴백'같다고 말하며 '겉모습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나 그만큼 애착이 간다'고 말하며 그는 지금도 자신만의 소설 쓰기를, 달리기를 지속해나갑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한가요? 인생 그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걸까요?


인생 그거 걸어도 되는 걸까요 달려야 하는 걸까요?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Written By Project 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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