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세 번째 책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제주에 숱하게 갔었다. 선명하게 기억한다. 눈이 아플 만큼 눈부시던 바다를, 몸이 가볍게 떠오를 만큼 푸르던 숲을, 축축하고 따뜻하던 땅을.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죽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엔 옷가지들이 바다에 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 죽은 사람들이었어요. 다음날 새벽에 내가 우리 아기를 업고 아기 아빠 몰래 바닷가로 갔습니다. 떠밀려온 젖먹이가 꼭 있을 것 같아서 찾았는데 안 보였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옷가지 한 장 신발 한 짝도 없었어요.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226p)
시험 기간에 달달 외웠던 역사 속 사건 중 하나였다. 시험에 나왔던 선지 하나였다. 언젠가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프로그램에서 봤던 적이 있다. 사람들이 죽었던 자리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고. 제주 4·3사건... 죽은 사람들은 나에게 교과서 속 한 줄이었고, 3점짜리 문제의 선지 하나였고, TV 프로그램에서 흘려 들은 이야기였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날을 기억한다. 그 따뜻한 전율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 읽지 못했다. 한강의 소설은 늘 숙제 같았다. 그가 쓰는 문장은 버거웠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경하가 인선과의 프로젝트를 미뤄왔듯, 죽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선의 말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랐듯. 책은 반절 정도 읽은 후 방치되어 있었다.
소설은 경하의 꿈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곧 한강의 꿈이다. 그는 2014년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를 출간한 후 소설을 쓰며 느낀 고통과 독자들이 느낀 고통이 연결되어있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그리고 꿈을 꾼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 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9p)
마치 개인적 예언처럼 찾아왔던 그 꿈은, <작별하지 않는다> 로 이어진다. 그는 이 소설을 쓴 후 생각한다.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마주한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기꺼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던 날이 떠오른다. 작은 영화관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본 날이었다.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지휘관 루돌프 회스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을 담는다. 회스의 아내 헤트비히는 아름답게 정원을 꾸미고, 죽은 유대인들이 남긴 비싼 모피를 입어보며, 남편과 함께 밝은 미래를 계획한다. 유대인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학살할 수 있는 소각장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은 평범한 비즈니스 회의를 하듯 일상적이다. 유대인들을 소각하며 검은 연기가 타오르고, 담장 너머로 총소리와 비명이 새어나오지만 그들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헤트비히의 집에 방문한 그녀의 엄마가 그 연기와 소리에 역겨움을 느끼고 쪽지를 남기고 떠나지만, 헤트비히에겐 그 쪽지마저도 짜증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영화엔 학살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평화로운 일상만이 존재한다.
수용소에서 노역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사과를 남겨 두던 소녀 알렉산드라의 온기는 열화상 카메라로 포착된다. 일반 카메라로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기로 선택하고 무엇을 보지 않기로 선택하는가.
베를린에 있는 추모 공원에 관처럼 서있던 돌들을 생각한다. 어린 아이처럼 작은 돌도, 나와 키가 비슷한 돌도 있다. 그 사이에 들어가 느꼈던 차가움을 떠올린다. 공원 한 쪽에서는 사람들이 돌 위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때 알았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가야 한다. 무릎까지 퍼렇게 차오른 물을 가르며 걸어서, 더 늦기 전에 능선으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믿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등성이 끝까지. 거기, 가장 높은 곳에 박힌 나무들 위로 부스러지는 흰 결정들이 보일 때까지.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27p)
나는 책을 마저 읽어야 했다.
이 부딪히는 턱이 빠질 듯 얼얼해, 눈 덮인 소매의 빳빳한 겉면을 잇새에 물고 버티다 퍼뜩 생각한다.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133p)
경하는 죽음을 생각하다 인선의 부탁을 받는다. 유서에 수신인을 적지 못한 채로, 인선의 손가락이 잘려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오는 탓에 제주 집에 남겨진 새 아마를 살리기 위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새를 위해 경하는 산다. 눈밭에 떨어져 몸을 덮는 눈송이들을 보며 죽은 사람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을 떠올린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경하는 새를 떠올린다. 하지만 새가 있어.
소설을 읽는 내내 발이 푹푹 꺼지는 눈밭을 걷는 느낌이었다. 눈이 손등에 닿으면 피부의 온기 때문에 곧 녹아버린다. 그 덕에 피가 따뜻하다는 게 느껴졌다. 가출했다 다쳐 돌아온 어린 인선을 엄마 정심은 꾸짖지 않는다. 그저 꿈을 이야기할 뿐이다.
내가 다친 걸 진작 알았다고 그때 엄만 말했어. 병원에서 연락 오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내가 축대에서 떨어졌던 그 밤에 꿈을 꿨다고 했어. 다섯 살 모습으로 내가 눈밭에 앉아 있었는데, 내 뺨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를 않더래. 꿈속에서 엄마 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게 무서웠대.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 안 녹고 그대로 있나. (81p)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고 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 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
그 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84p)
다만 이상한 건, 엄마가 내 가출에 대해 그때에도, 그후로도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는 거야. 내 행동을 탓하지 않았고, 이유조차 묻지 않았어. 수십 년 전 그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어. 어린 자매가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내 장사를 치른 과정에 대해서도, 그후 어떤 끈기와 행운으로 살아남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오직 그 눈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야. 수십년 전 생시에 보았고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당신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이기라도 한 것처럼.(86p)
인선은 경하에게 자주 따뜻한 것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국수를, 죽을, 차를... 그리고 인선은 베트남 밀림 속 마을을 다니며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1940년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할머니의 치매 걸린 일상을 담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경하의 말처럼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세상이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지에 대해 안간힘으로 글을 쓰며 살아가는, 그리고 그 버거움에 죽음을 생각했던 경하를 인선은 살린다. 경하는 인선의 집에서 죽었던 새와 서울에 있어야 할 인선을 만난다. 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인선은 증언을 하듯 엄마 정심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정심이 가족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기 위해 애써온 무수한 시간을, 희박한 가능성을 믿어야만 했던 희망을, 그리고 고통을 품고도 기꺼이 사랑했음을.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220p)
그후로는 엄마가 모은 자료가 없어, 삽심사 년 동안.
인선의 말을 나는 입속으로 되풀이한다. 삼십사 년.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281p)
경하와 인선은 어둠 속에서 촛불을 들고, 경하의 꿈에서 시작된-통나무를 심어 먹을 입히고, 눈이 내리길 기다려 그걸 영상으로 담기로 한-프로젝트의 나무를 심을 땅을 보러 향한다. 눈이 그치고 다시 오자고 말하는 경하에게 인선은 다음에 없을 수도 있잖아, 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둘은 내려가고 있다.
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 그리고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며.
대답 대신 나는 손을 뻗어 뼈들의 사진 위에 얹었다.
눈과 혀가 없는 사람들 위에.
장기와 근육이 썩어 사라진 사람들.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
아니, 아직 인간인 것들 위에.
이제 닿은 건가,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더 깊게 입을 벌린 해연의 가장자리,
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인가. (302p)
Book Comment
죽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단된 손가락의 신경을 죽이지 않기 위해 3분에 한 번씩 환부에 바늘을 찔려야 하는 인선처럼, 아픈 역사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고통스러워야 하는 것이라고,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작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강하게 느낀 것은, 오히려 생생하게 뛰는 심장이었습니다. 인선에게 아무런 꾸지람도, 기대도 없이 그저 따뜻한 뺨을 쓰다듬는 정심의 뻐근한 사랑이 느껴졌어요. 그 뻐근함은 생명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 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p)
한강은 소설을 쓰는 시간을, 질문을 견디며 그 끝에 다다르는 시간이라 말합니다. 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한강, 2024년 노벨문학상 강연에서.)
그는 여덟 살 아이일 적 썼던 시에서처럼 사랑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소설을 써내려갑니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지극히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한강은 말합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그리고 그는 소설을 쓰며 사용했던 몇 권의 공책들에 이런 메모를 남깁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이 글은 고백처럼 썼습니다. 타인과 세상을 외면하는 것의 간편함, 사랑하지 않는 것의 달콤함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기 위해 이 질문에 마주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면 어느 정도는 대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작했던 시점에서 조금 더 변형됐을 뿐이었어요. 하지만 시작했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왜 이 질문을 마주해야 하는 걸까요? 여러분들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무엇인가요?
도통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남기고, 저는 글을 마치려 합니다.
아직 한강의 글을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이번 기회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직접 읽어 보시기를 조심스럽게 권해 봅니다. 감각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듯 합니다.
Written By Project E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