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다섯 번째 책 :
시몬 드 보부아르, <모든 사람은 혼자다>
시몬 드 보부아르,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친애하는 구독자님께.
저는 회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회계사에게 겨울이란 혹독한 계절입니다. 보통 3월에 감사보고서가 공시되기에, 1월부터 3월까지 높은 강도로 일을 합니다. 아침부터 새벽 2~3시까지 일하다 보면 주 100시간은 거뜬히 넘기곤 합니다. 이 시기를 회계사들은 '시즌'이라 부릅니다.
시즌의 악명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또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이 가지는 기울기나 속도감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점점 더 빠른 속력으로 쌓여가는 업무를 뒤로 한 채, 하루를 끝냈다는 감각 없이는 편히 잠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업무 강도보다 강렬하게 느꼈던 것은,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은 타인을 쉽게 미워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회계감사란 팀원들과 협력해서 하나의 감사보고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끊임없이 리뷰가 오가고, 보완하고, 회사 담당자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타인과 계속해서 상호작용을 해야 했습니다. 타인과 매 순간 함께하며, 이상하게도 연결감보다는 단절감을 느꼈습니다. 단 1분이라도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시즌이 끝난 후 여행보다도 절을 찾았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강원도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가 운영하는 명상 스테이에서 3박 4일을 보냈습니다. 아침에는 스님과 요가를 하고, 고요한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또 스님과 명상하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월정사를 걷거나,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구독에 이러한 조건을 붙였습니다.
'물리적인 구독료는 없습니다. 다만 48시간 이내에 답장을 주셔야 한다는 유일한 약속이 있습니다.'
4편의 글을 쓰고 답장을 받으며, 제가 그 무엇보다도 물리적인 구독료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글을 읽는 데 들인 시간, 답장을 고민하고 써 내려가는 데에 들인 시간, 글에 담은 각자의 삶의 무게, 무겁고 가벼운 대답과 마음이 차곡차곡 제 메일함에 쌓여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물리적입니다. 여러분이 답장을 보내주시면 하나하나 'Project Esa' 메일함에 옮겨 담아두고 있습니다. 저는 이 메일함을 어떤 화폐나 물건과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4권의 책을 통해 물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는 '방향성'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사랑과 선택'을,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타인과 생명'을,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자신다운 삶과 지속성'을요. 그리고 다섯 번째 글을 쓰면서는 지금 할 수 있는 나름의 대답을 적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20번째 책에 이르기까지 어떤 질문을 해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글은 조금은 편히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마음이 동할 때 답장을 주시면 됩니다. 쉬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답장을 쉬어 가셔도 좋습니다. 지금까지의 제가 드린 질문들에 대한 저의 대답이자, 여러분의 답장에 대한 답장으로 읽어 주세요. 이번 책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모든 사람은 혼자다> 입니다.
1. "그다음은?"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어느 날 피뤼스는 징벌 계획을 세우고, "우선 맨 먼저 그리스를 정복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시네아스가 "그렇다면 다음에는?"하고 물었더니, "아프리카를 손에 넣자"-"아프리카의 다음에는?"-"아시아에 건너가서 중앙아시아를, 아라비아를 침략하자."-"그러면, 그 다음에는?"-"인도까지 가자."-"인도 다음에는?"-"아아!"하고 피뤼스는 한숨을 쉬며 "휴식하기로 하자"고 했다. "왜, 지금 당장이 아니고?"라고, 시네아스가 물었다.
시네아스가 현자인 것 같다. 어차피 자기 집에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출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중지해야만 한다면 시작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내가 어디서 멈춰야 할지 처음에 정해두지 않았다면, 출발한다는 것은 더욱더 허무하게 생각될 것이다.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시작할 것인가? (13p)
인간은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나라를 정복하며, 소망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언제나 반드시 "그다음은?"이 있다. 매 순간 그는 항상 새로운 정열을 품고 새로운 기획 속에 몸을 던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의 척도는 무엇일까? 인간은 어떤 목적을 세울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인간에게는 어떤 희망이 허용되는 것일까? (16p)
<리스본행 야간열차> 로 시작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루기까지 저는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나의 다음은 무엇일까? 지금의 나는 나 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끔은 이렇게 계속 다음을 물어가는 과정이 전진보다는 순환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반복해서 같은 한계, 같은 문제, 같은 물음에 다다르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계속 다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과연 맞는가? 왜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가?
시네아스가 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피 집에 돌아올 거, 어쩌피 쉬게 될 거, 뭐하러 떠나나요? 다시 내려올 것인데 왜 산에 오를까요? 다시 집에 돌아와 '역시 집이 최고야'하고 깨달을 건데 왜 여행을 떠날까요?
보부아르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시네아스의 말을 듣지 않은 피뤼스가 옳았다. 피뤼스는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복할 것이다."그럼 그다음은?" 다음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한다. 그는 오늘 저녁 리옹에 도착하려고 서두른다. 그 이유는 내일 발랑스에 가고, 모레 몽텔리마르에, 그리고 그다음 날에 아비뇽에, 또 그 다음 날은 아를에 가기 위해서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수도 있다. 아무리 해 보았자 실제로 그는 님이나 마르세유도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니 말이다. 본이나 콘스탄티노플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는 자신의 여행을 할 것이다. (79p)
우리는 여행에서 돌아오더라도 또 여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어디에 당도했을까요? 다시 베른으로 돌아왔을까요, 리스본에 남았을까요,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떠났을까요?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난 리스본에서 '그다음은?'이라고 묻게 될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나의 마라톤을 완주한 후에도 그다음 마라톤을 준비할 것입니다. 하나의 소설을 다 쓴 후에도 그다음 소설을 쓸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쓴 다음에도 그다음 글을, 그다음 책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다음은?'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 반복됨을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이방인의 선택
<이방인>은 보부아르가 자주 인용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당위를 무시하고 감각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부모가 죽으면 마땅히 이 정도는 슬퍼해야 한다, 사랑하면 결혼해야 한다, 살인은 나쁜 것이다...와 같은 우리 사회의 '마땅함'들이 뫼르소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뫼르소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느낍니다. 그는 '(자연의) 태양' 때문에 방아쇠를 당깁니다. 그에게 놓여 있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이 그저 감각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조금 낯설죠. 낯선 나라에 처음 여행을 갔을 때의 감각을 떠올려 보세요.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나와 무관하며, 세계와 동떨어진 존재로 뚝 떨어진 기분.
카뮈가 말하는 '이방인'에는 인간이 근원적으로 감당해야 할 우리 존재의 묵직한 가벼움, 곧 '실존'에 대한 고독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세계와 나 사이에는 그 어떤 기존의 연관성도 없다. 하나의 단순한 소여로 자연 속에 들어있는 한, 그 어떤 것도 나의 소유는 아니다. 만일 어떤 나라 안에 내가 단지 식물처럼 솟아나 있다면, 그 나라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위에 세워진 것이라도 내가 관여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건물을 수동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돌은 그 건물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카뮈의 "이방인"이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관계들을 전부 거절한 것은 당연했다. 그 어떤 관계도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의 앞에 있는 대상은 여전히 무심하고 낯설다. 사회적, 유기적, 경제적인 관계는 외적 관계에 불과하고, 그 어떤 진정한 소유의 기초도 마련해 주지 않는다. (23p)
우리에게 처음부터 주어져 있던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태초에 이방인으로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는 바로 그 낯섦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부아르는 말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저는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토마시가 테레자를 선택한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그레고리우스가 영혼의 이끌림을 따라 떠난 것도 선택입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선과 경하가 타인의 고통과 작별하지 않기로 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기에 존재합니다. 선택-그것이 이방인인 우리가 세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요?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설령 선택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저 아이는 나의 형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를 위해서 운다면, 벌써 그는 나에게 있어서 이방인이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의 눈물이다. 무엇 하나도 나 이전에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라고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물었을 때 그리스도는 하나하나 이름을 들어서 대답한 것이 아니라, 착한 사마리아인의 우화를 이야기했다. 길가에 버려진 사나이에게 자신의 외투를 입혀서 도와준 사마리아인이 바로 그 버려진 사람의 이웃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사람은 누구의 이웃도 아니다. 어떤 하나의 행위를 통해 자신이 타인의 이웃이 됨으로써 타인을 자신의 이웃으로 만든다.
...
이와 같이 세계와 우리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27p)
3. 캉디드의 뜰
캉디드의 뜰 을 아시나요? '캉디드의 뜰'은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의 풍자 소설 <캉디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온 개념입니다. 주인공 캉디드는 긴 고난과 방황을 겪으며 세계의 부조리와 마주하지만, 그 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뜰을 가꾸어야만 합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거대한 이념이나 추상적인 구원에 의지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복잡한 세계를 논하는 대신,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선택하자는 태도입니다. 그가 말하는 '우리의 뜰'이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삶의 자리를 스스로 가꾸며 살아가자는 실천적 결론입니다.
보부아르는 <모든 사람은 혼자다> 에서 이 개념을 실존주의적 관점으로 확장합니다. 그녀는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존재하며, 그 관계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즉, 보부아르에게 '캉디드의 뜰'은 우리가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그 행위를 통해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삶의 태도를 상징합니다. 세상에 이방인으로 내던져진 우리는, 끊임없이 '그다음은?' 이라는 질문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할지 선택해나가며, 세계와의 관계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도달하는 곳은 우리의 선택으로 가꾼 우리만의 뜰입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뜰을 경작하며 비로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의 한 조각이 나에게 속하기 위해서는 다만 내가 실제로 그것을 경작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의 활동은 자칫 태만해지기 쉽다. 인간은 참된 행위를 성취하는 대신 거짓 외관에 만족한다. 역마차에 붙어 있는 파리 한 마리는 마차를 산꼭대기까지 끌고 간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연설을 하거나 사진을 찍으며 어슬렁거린 사람은 전쟁 혹은 원정에 참가한 것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행위는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과 모순되는 일조차 있다. ... 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캉디드가 우리를 가두려 하는 뜰에 그 어떤 차원도 정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이 뜰은 미리 제시된 것이 아니다. 그 장소나 한계를 선택하는 일은 완전히 나에게 달린 문제이다. (29p)
캉디드의 뜰은 그러므로 원자로 환원될 수도, 우주와 혼동될 수도 없다. 인간은 자신을 선택함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선택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소멸하고 만다. (78p)
4. 타인
그림은 그것을 보는 하나의 눈을 요구한다. 즉 누군가에게 이 구불구불한 선들이 배도 되고 말도 되어야 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 아이는 색을 범벅으로 칠한 그 종이를 자랑스럽게 들여다본다. 그때부터 거기에는 진짜 배가 있고 진짜 말이 있게 된다. 만일 혼자였다면 이런 엉성한 선들에 감히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또한 이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단단한 다이아몬드로 바꾸려 하지는 않았던가. (89p)
저는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이 질문보다도 제가 답하기 어려웠던 질문은 '왜 이 질문을 해야 하는가?' 였습니다. 타인이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여러분들의 답장이 없었다면 이 프로젝트는 제게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글을 썼을까요? 그 글은 지금껏 썼던 글과 비슷할까요 다를까요?
보부아르는 타인이란 단순히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존재의 전제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그림을 그린 후 부모에게 뛰어가 자랑스럽게 그 그림을 펼쳐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그림은 타인의 눈으로 인하여 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예술이 되는 이유는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라는 존재는 저라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타인의 자유로 인하여 인식 가능한 것입니다. 타인이 수동적으로, 사물처럼 존재한다면 저는 제 존재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주에 아무 타인도 없이 홀로 존재하는 스스로를 상상해 봅니다. 저는 제가 지구에 있다고, 존재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타인 없이 우리는 자아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자유가 우리 존재의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자유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존재하기 위해 함께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름, 모든 요구는 타인의 자유에서 나온다. 내가 만들어 낸 대상이 유익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타인이 그것을 유익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그때에만 나는 유익한 물건을 만들어냈다는 정당성을 얻게 된다. 타인의 자유만이 나의 존재를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나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나의 면전에 자유로운 사람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나의 기획이 모든 의미를 잃는 것은 남의 나의 죽음을 선고할 때가 아니라 세계의 종말을 선고할 때이다. (121p)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것을 선험적으로 실험해 볼 수 있습니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들을 효과적으로 학살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을 비인간으로 만드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유대인을 수송할 때는 화장실을 그 수에 비해 아주 적게 만들어, 사람들이 오물 속에서 생활하도록 만들죠. 그건 기본적인 생리적 존엄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유대인 개개인의 가치를 0으로 수렴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어떤 집단은 개인의 가치를 0으로 만들어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0에 아무리 숫자를 곱한다 한들 그것은 0일 뿐입니다. 개인의 가치를 0으로 만드는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타인의 자유를 앗아가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의 존재도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퇴폐기의 로마인들은 자기들을 위해 일하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저주하면서, '저것들은 야만인들이야. 노예들이야'라고 생각하였다. '저건 검둥이다'라고 버지니아 주의 농장 주인은 생각했다. ...노예들은 인간으로 인정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이때 이 기식자는 자기가 사용하는 대상의 인간적인 성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낯선 자연 한가운데에서, 타성태의 사물들 사이에서, 사물들의 거대한 무게에 짓눌려 어떤 신비한 운명에 예속되어 살고 있는 것이다. 도구, 기계, 집, 그리고 자기가 먹는 빵 안에서 그는 그 어떤 자유의 표지도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물질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물질에 의존하는 한, 그도 또한 물질일 수밖에 없고 수동성일 수밖에 없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제거함으로써 그 자신도 사물 사이의 사물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 변신에서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131p)
내가 폭력을 가하는 인간은 나의 동지가 아니다. 그를 뺀 다른 사람들이 나의 동지가 되어야 한다. 폭행의 사실이 폭행당한 사람의 자유에 호소할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되면 될수록, 그만큼 후회의 감정도 적게 일어난다. 즉 상대가 아이나 병자일 때 사람들은 비교적 대수롭지 않게 힘을 행사한다. 하지만 내가 모든 인간에게 폭력을 가한다고 하면 나는 세상에 단 혼자가 되어 자멸할 것이다. (145p)
보부아르는 <모든 사람은 혼자다> 를 쓴 후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를 씁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말합니다.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과 같은 모든 의례는 집단이 개인에게 경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재판 의례는 사회 구성원이 지닌 특수성을 경시하지 않기 위해 사회가 개인에게 표현하는 존경이라고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을 존중할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폭력이 행해지면 인간은 물건처럼 여겨집니다. 인간의 생명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희생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회가 개개인에 대한 존엄을 복구하고, 개인을 유일하고 환원 불가능한 가치로 확립함으로써 '희생'이라는 말은 그것이 지닌 모든 의미를 되찾습니다. 인간이 자기 계획, 미래, 인생을 단념함으로써 상실하게 된 것이 더 이상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사랑보다 더 타인의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모든 사람은 혼자이지만, 혼자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일까요?
우리는 존재하기 위하여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다면 반복하여 할 수 있는 만큼을 더 늘려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위험하더라도, 그렇게 닿는 곳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이더라도 지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연대이고 사랑이라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실존적인 행위라고, 저는 대답하고 싶습니다.
타인들이 확실하게 내 존재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은 오로지 내가 나의 존재를 향해 자유로운 기투의 운동을 벌일 때뿐이다.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세계 속에 하나의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 각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를 우선 내 주변에 출현시켜야만 한다.
즉 사랑하고, 소망하고, 행해야만 한다. (137p)
나의 행동은 이 미래의 위험을 책임지는 것이다. 이 미래의 위험들이 나의 유한성의 이면이고, 나는 나의 종말을 책임짐으로써만 자유롭다. 그리하여 인간은 행동할 수 있다.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는 자신을 초월함으로써만 존재한다. 그는 위험 속에서, 실패 속에서 행동한다. 당연히 그는 위험을 책임진다. 즉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던짐으로써 그는 자신의 현존을 확실하게 설립한다. 그러나 실패는 자신을 책임지지 않는다. (148p)
Book Comment
요술램프 지니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장면을 종종 상상합니다. (챗gpt가 보부아르 버전의 지니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압구정 현대 아파트나 두둑한 비트코인 가상 지갑도 가능하다고 꼬드겨도 저는 유일한 소원으로 타인을 말할 것 같습니다. 함께 지켜봐 주며 우리의 뜰을 멋지게 경작해 나가는 것.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저번 글에서 다룬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며 자주 머물렀던 지점은 하루키의 아내, 요코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재즈클럽을 운영할 때도, 소설가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도, 마라톤을 뛸 때도 늘 그의 리듬을 존중하며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줍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의 삶이, 그의 글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런 동반자가 있는 그가 조금 부러웠습니다.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어렴풋한 생각들을 언어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보부아르의 문장들을 나누고 싶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언어화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그녀의 문장들로 정리해 볼 수 있었어요. 부끄러우니 그녀의 문장을 빌려, 제 글은 읽어주는 여러분들이 있어서 쓸 수 있는 것이라고, 감사함을 담아 답장으로 보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타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여러분은 어떤 뜰을 경작해 나가고 싶은가요?
보부아르의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이번 글에서만큼은 여러분께 답장의 자유를 드리려 합니다.
글로 인하여 여러분의 한 주가 조금은 더 즐거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애정을 담아,
Project Esa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