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두 번째 책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92p)
첫 번째 테마 : 선택
어느 날 문득 이 책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읽었던 기억이 흐릿한 책이었다. 외과 의사이면서 '사랑'과 '육체적 관계'는 다르다는 본인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토마시, 그리고 그런 토마시를 지고지순 무거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테레자. 토마시의 애인이자 그처럼 가볍게 살아가는 화가 사비나와 무거운 남자 프란츠. 소설은 가볍고 무거운 4명의 인물의 삶을 그려내고, 그 중에서도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랑을 더욱 밀착하여 다룬다. 토마시는 육체적 관계를 마치 외과 의사가 수술을 집도하듯, 겉으로는 볼 수 없는 인간의 아주 작은 자아 일부분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어머니에게 성적, 정서적 학대를 당했던 테레자는 자기 육체가 남들과 동일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늘 악몽을 꾼다. 그녀에게 영혼과 육체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랑'과 '육체적 관계'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장소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이다. 7년간 나치 독일 지배하에 있었던 체코는,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소련 공산주의라는 시련을 마주한다. 둡체크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움직임은 짧은 봄처럼 얼마 되지 않아 소련의 침공으로 좌절된다. 인간이 가지는 개성, 사적인 삶, 자유, 표현과 같은 가치들이 의미를 잃는 사회적 현실 위에서 인물들이 선택하는 삶의 순간들은 더욱 두드러진다. 육체-자아 상실에 대한 테레자의 두려움처럼, 의지와 무관하게 마주하는 현실과 각자만의 괴로움 위에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 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17p)
한없이 가볍게 살아가던 토마시에게 삶의 무거움은 테레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그는 그동안 여성과 육체적 관계는 맺어도 동반 수면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답지 않게, 동반 수면을 넘어 테레자와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한다. 테레자의 바람에 따라 스위스로 망명한 토마시는, 테레자가 다시 프라하로 떠나자 일하던 병원의 원장에게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 중 마지막 악장은 이 같은 두 모티프로 작곡되었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원장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베토벤의 미소를 흉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토마시는 다시 한번 말했다. "네, 그래야만 합니다! Ja, es muss sein!"(59p)
나에게 왜 이 책을 선택했냐고 물어본다면,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테레자가 갑자기 토마시의 삶에 등장했던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이 책의 제목이 떠올랐고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았다. (Es muss sein! ) 그리고 사비나가 프란츠와 헤어진 후 느끼는 감정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감각적으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소름 돋도록 와닿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존재의 가벼움이 너무나 무거워 이 책을 떠올렸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201p)
두 번째 테마 : 우연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소위 우연의 일치라고 부르는, 사람과 사건 간의 우연한 만남들이 일어난다.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순간 토마시가 술집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러한 엄청나게 많은 우연의 일치를 우리는 대개 완전히 무심결에 지나쳐 버린다.(91p)
그렇다면 우연은 운명일까 선택일까? 답을 내리기 위해 보았던 로맨스 영화와 드라마들을 총동원 해봤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전개를 위해 만들어낸 장치 같은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이사를 했는데 좋아하는 사람의 옆집에 살게 된다든가, 우연히 만났던 사람을 직장에서 거래처 상대방으로 만나게 된다든가. 현실에서 바라기엔 터무니없어 보였다. 만들어낸 우연과 운명은 간편해 보였다.
그럼에도 최근 가장 뜨거웠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금명을 만나고 싶었던 충섭은, 매일 같이 금명이 일했던 극장에 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렀을 때, 우연히 버스에 탄 금명을 발견한다. 버스를 따라 뛰어 보지만, 인간의 속력으로는 역부족이다. 포기해야 합리적인 상황에서, 충섭은 이 우연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금명의 나레이션처럼 'IMF가 오지 않았더라면, 실직하지 않았더라면, 극장이 문을 닫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모든 우연의 톱니바퀴가 제 몫을 했던 이유는 충섭의 달리기였다.
토마시는 그의 친구 Z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이라기 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칠 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 신경통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시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호텔이 다섯 개 있었는데, 토마시는 우연히 테레자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자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시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시를 테레자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자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 때문에 보헤미아로 되돌아왔다. 이렇듯 치명적 결정은 칠 년 전 외과 과장에게 좌골 신경통이 없었더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우연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64p)
작년 9월, 파리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원래 파리에 갈 생각이 없었다. 리스본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너무 비쌌고, 마침 프로모션으로 파리-인천 편도 비행기표를 30만원에 예매할 수 있었다. 우연히 5년 전 유럽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된 파리를 다시 여정의 끝으로 여행했다. 그리고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니 멋진 우연과 순간을 만났다. 당시의 생생한 기분이 적힌 일기를 꺼내 봤다.
'저녁을 먹고 에펠탑을 가까이 보러 갔다. 가는 길에 에펠탑이 반짝거리는 걸 보고 싶은데 반짝거리는 시간을 몰랐고 그냥 걸었다. 에펠탑 앞에 도착하자마자 반짝거렸다.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바토무슈를 탈 땐 와인이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자 뒤에 앉은 부부가 와인을 나누어주셨다. 줄이 길어 들어갈 엄두를 못 내던 셰익스피어 서점을 갑작스러운 비 덕에 줄 없이 들어갔다. 나오자마자 화창해진 날씨와 길어진 줄을 보고 '파리 나한테 왜이래?' 라는 말이 터져나왔다. 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가고 싶은 대로 가. 그러다 보면 계획보다도 멋진 삶이 펼쳐질 거야.'
어쩌면 그 모든 우연은 무심결에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우연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고민하며 떠난 여행의 마지막 여정에서 어떻게 살지에 대한 힌트가 되어주었다.
그건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세 번째 테마 : 사랑
토마시는 늘 테레자를 선택했다. 테레자를 위해 스위스로 망명했고, 테레자가 프라하로 돌아가자 다시 그녀를 따라 떠났다. 소련이 통치하는 프라하는 그에게 위험했다. 결국 그는 공산주의를 비판했던 글로 인해 직업을 바꾸어 유리창 청소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삶의 마지막 장에서는, 시골으로 떠나자는 테레자의 말을 따른다. 외도가 불가능한 시골에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토마시가 추구했던 모든 삶의 방식을 떠난다는 의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플라톤의 <향연>의 유명한 신화를 떠올린다. 신화의 내용은 이렇다. 옛날에 인간은 양성을 동시에 지녔고, 신이 이를 반쪽으로 분리해서 그때부터 서로 반쪽을 찾으려고 헤맸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욕망이라고 신화는 말한다. 신화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정해진(Es muss sein!) 운명의 상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토마시는 테레자를 사랑했다. 그는 신화 속 잃어버린 반쪽이 아닌, 테레자를 선택할 것임을 알았다. 사랑은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한없이 가벼웠던 그는 사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종착역에 이른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이 바로 나야.”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당신의 임무는 수술하는 거야!”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그의 목소리로 미뤄 보아 그 말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 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506p)
Book Comment
뜬금없지만, 재즈를 좋아합니다. '재즈에는 틀린 음이 없다'고 하죠. 때로는 실수하고, 계획이 틀어지고, 예기치 못했던 상황들이 펼쳐지는 것이 삶이듯 재즈에서는 그 모든 빈틈이 모여 조화를 이룹니다. 오히려 빈틈이 없다면 재즈는 아름답지 않을 거예요.
이 책은 재즈 같은 책입니다.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인물들의 불완전함도 마지막 장을 넘기며 아름다운 화음이 되어 갔습니다. 삶의 다양한 면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현실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이념, 정치 등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다루고 있어요. 그 중에서도 제게 특히 아름다워 보였던 세 가지 테마를 골라 보았습니다.
저는 종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곤 합니다. 우연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선택도 어려울 만큼 인생이 복잡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소중한 답장들을 읽으며, 이런 고민이 비단 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무용한 밑그림이며, 첫 번째 리허설이자 본 무대 자체이니까요.
정답은 없겠지만, 이 문장을 끝으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려 봅니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13p)
Written By Project Esa
글은 출처를 밝히고 자유롭게 공유하셔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