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소심한 나)
왜 '배려'와 '눈치'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오늘은 조금 찌질해 보이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의 소심(?)한 성격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요새 여러 성격유형 검사들이 생겼다.
라떼(?)는 단순 혈액형으로 모든 성격들이 설명되는 세상이었지만
지금은 DISC나 MBTI 등, 여러 사람의 성향을 알아볼 수 있는 도구들이 생겼고
특히 MBTI는 요즘 정말 대세인듯하다.
처음 MBTI 검사 후, 내면의 나와 흡사한 결과지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던 것 같다.
아무튼 소심한 성격 덕분에 어릴 적부터 자신의 내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던 나는
지금까지 나름 나 자신의 성격을 어느 정도 잘 파악하고 있고
단점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격의 장단점들이라는 것들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을 알기에
어느 한쪽으로 모나지 않고 돌출되지 않도록 노력해왔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역시 성격이란 쉽게 고치고 극복할 수 없는 문제란 것을 깨닫고 있다.
알면서도 실행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이따금씩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물론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또다시 여러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면
사람의 성격이란 정말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오늘은 그중 나와 같이 소심한 사람들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배려에 대한 이야기이다.(물론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나의 경우에는 '배려'라 쓰고 '눈치'라고 읽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 눈치란 좋게 말하면 배려가 되고 정말 나쁘게 받아들이면 사람에 따라서 위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배려라는 행동 자체는 결과물로서는 동일하고, 타인이 보기에 좋은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일상에서는 사실 이러한 눈치에서 배려로 전환되는 행동 프로세스에 그다지 무리와 부담도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눈치와 배려의 차이는 내가 타인을 위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김에 있어서
얼마만큼의 고민과 부담감이 작용하느냐는 것이다.
아주 미묘한 문제이고 약간의 어감의 차이로 나와 같은 성격의 사람의 행동(배려)에 대해서 곡해할 수도 있기에 글을 써내려 가면서도 점점 더 신중해지고 어려워지는 것 같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제의 핵심은 간혹 상대방을 배려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고민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안의 경우 행동에 옮기기 직전까지 고민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난 후에도 고민을 한다.
물론 그 고민은 과연 나의 배려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고민인데,
원인은 말 그대로 나란 사람이 대인관계에 있어서 여러 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대화 중 상대방의 표정이나, 말투 등 여러 가지 분위기를 통해
말속에 감추어진 이 사람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애쓴다.
또는 불편해하는 모습이 보이면 이 사람이 무엇을 불편해하고, 무엇이 필요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고
그 사람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게 된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좋게 말하면 이런 경우는 센스(=눈치)가 있다고 보일 수도 있지만
센스는 말 그대로 살아온 경험과 대인관계의 노후로 자연스럽게 몸에 베인 것으로
고민의 흔적이 담긴 눈치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나는 왜 이렇게 눈치를 보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 명쾌하다.
내가 딱히 인간관계에 있어 적극적이지도 않지만 껄끄러운 것은 싫고 그저 좋은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기 때문이다.
즉, 가능하면 좋은 게 좋은 것이고.
그러다 보니 명쾌하게 싫은 소리를 못하고 혼자 속앓이만 하고
그렇다고 싫은 소리를 어쩌다 한 번이라도 하면 안 하니만 못한 만큼 더욱 가슴이 답답해지고,
이런 것들이 악순환이 되는 것 같다.
또 과거 '인간관계에 있어서 배려라는 장애물'이라는 글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나의 배려가 상대방에도 배려로 받아들여 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배려가 괜한 오지랖이 아닌지
과연 상대방이 흔쾌히 받아들이고 좋아해 줄지
오히려 상대방의 기분을 헤치는 것은 아닐지
항상 고민하게 된다.
게다가 상대방의 리액션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괜한 배려로 인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혼자 내내 걱정을 한다.
지금까지 무엇이 문제인지도 정리해보고,
왜 그런지도 나름 고민해보면서
오늘도 이렇게 나의 감정들을 풀어서 적어 보니
나의 이런 인간관계 속에서 배려, 눈치에 따른 고민들과 답답함들은
결국 나 혼자 지지고 볶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는 뭘 이런걸로 이렇게까지 고민하는거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일단 근본적으로 상대방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과
배려를 했을 때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고민과
배려를 안 했을 때 상대방에게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들이
나를 혼란과 고민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인데
실상 이러한 고민들 속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지레 겁먹고 고민하는 것은 나 자신일 뿐이다.
상대방은 아직 아무런 실망도, 아무런 호의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두려울 뿐인 나란 사람의 선제적인 발버둥일 뿐인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내가 싫어서 노력도 많이 했다.
주로 싫은 이야기라도 가능한 풀어내는 쪽으로,
상대방이 날 싫어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할 말은 해야겠다고 많이 다짐하고 그렇게 하도록 노력도 했다.
물론 행동적인 변화는 조금씩 변화되고 있다고 생각 들지만
혼자 고민하는 못된 습관은 아직도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그럼에도 사람은 계속 다짐하고 후회하고 또 다짐하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성격 개선을 위한 노력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행복과 평안함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고전인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책에서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타인과의 인간관계(사랑)에 있어서도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해준다. (자기애와 이기심은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대인관계에 적극적이고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고 소중히 함으로써 자신감과 자존감을 키울 필요가 있다.
과감하게 욕먹을 용기와 각오를 위해서 말이다.
오늘도 다짐해 본다.
앞으로 상대방을 배려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지 말고
나의 배려가 상대방에게도 배려로 받아들여질지 고민하지 말고
타인의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미리 사서 고민하지 말고
내가 주체가 되어 소신껏 내가 후회하지 않을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