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친척집에 방문하기 위해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간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터미널에서 버스가 출발 대기를 하는 동안 버스 안으로 들어와 판매행위를 하는 장사꾼들이 간혹 있었는데 그날도 역시 터미널에서 대기하는 버스 뒤쪽 창가에 앉아있는데 어떤 사람이 들어오더니 밑도 끝도 없이 작은 종이를 사람들에게 뿌려대기 시작했다. 받아보니 그것은 '행운의 추첨권'이었다.
"자자, 여러분 이 버스에서 단 3분에게만 드리는 행운의 기회. 다시없는 찬스. OO에서 농수산물 20만 원 치를 구매할 수 있는 상품권을 단돈 5만 원에 드립니다."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말을 들으며 사실 그 당시에는 이게 정말 무슨 이벤트인지 헷갈렸다. 그만큼 세상물정 모를 시절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내심 기대를 하며 추첨권을 열어봤다.
결과는 당연히(?) '당첨'
"당첨되신 분? "
우렁차게 외치는 장사꾼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설레었다. '안 그래도 친척집에 가면 음식 한다고 장 볼게 많을 텐데 이걸 선물해 주면 엄청 좋아하겠지?'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생각과 동시에 나와 중간쯤 어느 사람이 번쩍 손을 들자 장사꾼은 나머지 추첨권을 빠르게 회수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진짜 운 좋으시네요. 단돈 5만 원에 20만 원 치 상품이 구매 가능합니다. 구매하시겠나요?"
"... 저 아쉽지만 돈이 없어서요.."
그렇다. 당시 5만 원이면 나에게는 꽤나 거금이었기에 그리고 카드도 안 쓰던 시절이라 그만한 여유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물론 돈은 핑계였고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마냥 믿지도 않았다.
"돈이 모자라시면 할인도 가능합니다."
어떻게든 팔아보겠다는 장사꾼의 말에 그제야 정신이 더욱 들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도 아쉬워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
나의 말에 그분은 아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버스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사기를 조심하자'가 아니라 그저 '호구처럼 보이지 말자'였다.
호구(虎口)는 한자 그대로 호랑이의 입인데 국어사전을 보니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 뜻이 이렇게 된 것은 바둑에서 상대편의 바둑 석점이 이미 둘러싸고 있는 상태를 '호구'라고 하여 즉, 쉬운 먹잇감 같은 의미의 말이 확장된 것이라고 한다.
사람은 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려주지 않아도 안다.
아, 이 사람은 호구다. 특유의 말과 행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오라에 누구든 이 사람은 호구라는 것을 직감한다.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기분 나쁘게 해도 화도 잘 내지 않는 그 호구말이다.
지난 그 일이 있고 나서 돌이켜보니 상당히 기분이 나빴었다. 말 그대로 내가 호구로 보였다는 것 아닌가? 그 사람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제일 어리숙해 보이는 놈(나)을 이미 눈도장 찍어놓고 당첨이 적힌 추첨권을 밑장 빼기로 전달했겠지. 그것도 모르고 잠시나마 당첨된 마냥 설레었던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내 입으로 이야기하긴 그렇지만) 어린 시절 주변에서는 나름 착하다 착하다 해왔지만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바깥 세계 나와보니 나는 그냥 호구였던 것이다.
그렇게 호구로 30년 가까이 살아오다가 나 역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회생활은 더욱 냉정한 세계다. 조금만 어리숙해 보이면 여기저기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물론 조금 과장되게 표현한 부분은 있지만 호구로서 사회에서 버텨내기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 소심하고 답답하고 어리숙한 성격이라 말 한마디 못하고 가슴속으로만 끙끙 알아왔다. 그러다 보니 하기 싫은 일, 안 해도 되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회사나 회사외적인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하였고 스트레스가 계속 가중되었다.
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좋든 싫든 좋은 척을 하고,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참다 참다못해 지른 싫은 소리 한 번으로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관계를 수습하는 것은 나에겐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그냥 내 욕심이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만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결국 나는 40세가 다 되어서야 마음을 굳게 먹고 지금까지 모든 인간관계를 뒤집어 보기 시작했다.
우선은 착한 사람은 호구라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생각하고 생각해 보니 사실 내가 호구인지 아닌지는 결국 내가 정하는 게 아닌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호구인지는 바로 다른 사람이 정하는 것이다. 나를 호구로 규정짓고 악용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따지면 호구로 보인 내가 나쁜 게 아니라 호구로 보는 상대가 나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만인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버리기로 했다. 만인에게 다 좋은 사람이란 있을 수도 없다.
한 사람 한 사람 돌아보며 인간과계를 재정립하고, 나의 삶에 더욱 충실하기로 마음먹자 조금 더 타인에게 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게 또 과해지면 싫은 소리를 대놓고 팍팍 해버리는 무개념으로 변질될 수 도 있지만..(뭐든 적당히)
아무튼 결론은
날 호구로 보는 사람에게는 나도 좋은 사람일 필요 없고,
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호구처럼 보여도 괜찮다는 것!
하나뿐인 인생 내가 아닌 남들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살자.